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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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김남주 산문 전집≫ 맹문재 엮음
- [보도자료]
- 2026-05-17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김남주 산문 전집≫ 맹문재 엮음
『김남주 산문 전집』은 모두 7부로 구성되었고 연보와 부록이 첨부되었다. 1부에서는 김남주의 문학 편력을 만날 수 있고, 2부는 정치적 견해를 나타낸 산문들로 이루어졌다. 3부는 서신, 4부는 1990년 10월 29일부터 1993년 12월 4일까지의 일기, 5부는 대담, 6부는 강연으로 채워졌다. 연보에는 김남주의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는, 그리고 그 이후 계속 이어지는 시인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부록에는 새롭게 발굴된 초기 시 작품 다섯 편이 수록되어 전집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그렇다. 사랑은 눈물과 증오의 통일이다. 그 어느 쪽 하나만 있어 가지고는 사랑의 적을 물리칠 수 없다. 강약의 통일, 이것이 인간성의 본바탕이다. 이 인간의 본바탕에서 발을 떼고 원수를 사랑하라느니 적을 증오하라느니 호소하고 외쳐봤자 그 사랑의 무기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본바탕에서 일탈한 것은 일체가 허위이다. ‘즈믄 날 밤하늘의 거짓 없는 별’만이 칠흑의 세상을 밝히는 보석이고 불행한 이들의 희망이다.
그렇다. 사랑이란 바로 눈물과 증오의 통일이다. -<사랑은 눈물과 증오의 통일이다> 중에서
책머리에
김남주 씨는 분단 조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하다가 타계했다. 이와 같은 평가가 과장되지 않은 것은 그가 분단은 극복과 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온몸으로 실천하다가 옥고를 치른 기간이 장장 10년이나 된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행동과 일치된 작품 세계를 일관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그리하여 김남주 시인은 해방 이후 한국 시문학사에서 큰 거울로 서 있는 것이다.
이 전집에 수록된 산문은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삼천리, 1989), ≪시와 혁명≫(나루, 1991),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시와사회사, 1994)에 실려 있는 것을 원본으로 삼았다.
보리밥과 에그 후라이
1970년으로 기억됩니다. ≪창작과비평≫에 실린 김준태 시인의 <보리밥>이란 시를 입고 저는 ‘나도 한번 시를 써 볼까. 이런 것이 시라면 나라도 쓰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뜨근뜨근하고도 달착지근한 보리밥이다
남도 끝의 툇마루에 놓인 보리밥이다
금이 가고 이 빠진 황토빛 툭사발을
끼니마다 가득 채운 넉넉한 보리밥이다
파리 떼 날아와 빨기도 하지만
흙 묻은 입속으로 들어가는 보리밥이다
누가 부러워하고 먹으려 하지 않은
노랗디노오란 꺼끌꺼끌한 보리밥이다
누룽지만도 못하다고 상하로 천대를 받는
푸른 하늘 밑의 서러운 보리밭이 아닌가
개새끼야 에그 후라이를 먹는 개새끼야
물결치는 청보리밭 너머 폐허를 가려면
나를 먹어다오 혁대를 풀어제쳐
땀나게 맛있게 많이 씹어다오
노을녘 한참때나 눈치채어 삼키려는
저 엉큼한 놈들의 무변(無邊)의 혓바닥을 눌러앉아
하늘 보고 땅을 보며 억세게 울고 싶은데
이 시는 그 당시 저에게 통쾌한 맛과 재미를 주었습니다. 저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완전한 까막눈이신 제 어머니에게 이 시를 읽어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저보다 더 재미있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영락없이 꼭 우리 밥 먹고 사는 꼬락서니다” 하며 천연덕스럽게 웃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 시와 같은 시를 흉내내어 시라는 것을 처음 쓰게 되었는데, 나중에 주로 “보리밥은커녕 보리죽도 제때에 먹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한 판국에 버젓이”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에그 후라이를 먹는 자들을 골려주고 저주하고 마침내 때려눕히는 데 문학적으로 일조”하고자 시를 써왔습니다. 20여 년 전 김준태 시인의 시 <보리밥>을 내가 읽어드릴 때 그것을 귀담아들으시고 좋아하셨던 제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 새삼 떠오릅니다. (하략)
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우리 집
목소리만 듣고도 난 줄 알고 얼른 나와
문을 열어 주는 우리 집
조금만 들창으로 온 하늘이 다 내다뵈는 우리 집 (윤석중의 <우리 집>)
이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자주 불렀던 동요이다. 삼십 년,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끔 이 동요를 입에 올리곤 하는데 그때보다 나는 그 무렵 집 없이 남의 집 행랑살이를 했던 깨복쟁이 동무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에게 가장 서러운 일 중에 하나는 집 없는 서러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집 없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학교가 파하면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찾아들 집이 없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내 어린 시절의 아픔이 되살아나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소박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고 싶다.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배를 채울 밥과 입을 옷과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집을 갖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는 이런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작은 소망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족속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노고를 희생으로 하여 거재를 쌓아 올린 날치기 부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필요 이상의 밭과 옷과 집을 갖고 있다.
그들은 교활한 수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그런 자산을 지키기 위해 못된 권력과 손을 잡고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 나는 이따위 족속들을 증오하는 시를 쓰고 싶다. 독점 재벌들, 정상모리배들, 사기꾼들, 땅 투기꾼들, 이런 족속들은 집 없어 서러운 가난뱅이들한테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공동 재산이어야 할 땅이며, 집이며, 밥이며, 옷 따위를 독점하고 있는 족속들에게 인간적인 선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역사상 가진 자들이 기왕에 소유한 재산과 권력을 스스로 내놓는다거나 조금이라도 양보한 적은 없었다. 그들이 가끔 인간적인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었는데 그런 경우도 그들의 자발성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가난한 이들이 역경을 당했을 때 자선냄비에 동전 몇 푼을 던지고는 하는데 거기에도 앞날을 내다보는 교활하고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인은 이들이 가면 뒤에 감추고 있는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할 것이다. 현상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뜬 봉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시인은 사물과 인간과 현실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을까? 어떤 사회가 계급 사회라면 계급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그것은 가능한 것이다. 계급 사회에서는 인간 일반 따위는 없는 것이다. 자본가면 자본가, 노동자면 노동자, 소시민이면 소시민 등 구체적인 인간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의식도 그가 사회나 생산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다름에 따라 각양각색인 것이다.
문화의 다른 갈래와 마찬가지로 시도 현실의,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그 토대로 삼기 마련이다. 그러나 온전한 시는 현실의 구체적인 삶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역사적인 문제 등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었을 때 그것은 가능한 것이다.
집 없는 사람이 집을 갖지 못하는 데는 사회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자본의 그칠 줄 모르는 이윤 추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권력의 계급성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집을 마련하기 위한 지름길은 재산과 정치의 독점에 저항하는 것뿐이다.
나는 나의 시가 가난한 이들의 동무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내가 처음으로 쓴 시
며칠 전에 저는 청년 학생 노동자들로부터 어려운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문학을 지향하는 청년 학생 노동자들에게 몇 마디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당장에서 거절하고 마음이 편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지금 여간만 괴로운 게 아닙니다. 내 나이 겨우 마흔 살을 갓 넘은 주제에 청년들에게 어쩌고저쩌고 어른스러운 말을 한다는 게 건방진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에라 내 몰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 내가 몸소 겪은 체험담이나 늘어놓자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시라는 것을 써 본 것은 감옥에서였습니다. 그때가 1973년의 일로 박 아무개가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미친개처럼 설칠 때였는데 그때 저는 제가 감금되어 있는 감방의 벽에 다음과 같은 문자를 새겨 놓았습니다.
이 벽은
나라 안팎의 자본가들이
그들의 재산 그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벽이다
놈들로 하여금
놈들의 손톱으로 하여금
철근과 콘크리트로 무장한
이 벽을 허물게 하라
언젠가는 꼭
당시 저는 이게 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만 나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토해놓고는 어떤 쾌감을 맛보았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단결하라! 호소했다고 해서 나를 0.7평 남짓한 비좁은 공간에 쑤셔 넣은 자들에 대한 저주의 감정이 이런 문자를 벽에 새겨넣게 했을 것입니다.
제가 소위 시인으로서 문단에 나온 것은 1974년 여름호의 ≪창작과비평≫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때 ≪창비≫에 실린 제 시의 내용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농촌의 생활과 감옥에서 겪은 체험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때까지 누구로부터 문학 수업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제 스스로 학습한 적도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가끔씩 ≪창작과비평≫을 사서 시나 소설 등을 몇 편 읽은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창작과비평≫에 실린 이 사람 저 사람의 시를 읽고 이런 것이 시라면 나라도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이 시라면 하는 그 시들은 우리들 일하는 노동자나 농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들을 알기 쉬운 말로 써놓은 것이었습니다. 소위 문단에 등단하고 나서 저는 제법 시인 행세를 하면서 여기저기 잡지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당시 제게 있어서 관심거리는 현실을 변혁시키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시 쓰는 일에는 자연히 게을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씀드려서 그 당시 저는 변혁 사업에는 충실하지 못하고 시 쓰는 일에도 성실하지 못하는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어떤 결단을 내리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1978년은 일로써 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의 가입이었습니다. 그 결단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현실을 변혁하는 사상적 무기가 될 수 없다. 문학이 사상적 무기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노동자 농민 등 근로 대중의 삶을 궤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그리고 내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는 세계를 인간이 살기에 좋은 것으로 변혁시키기 위한 노동과 투쟁에 작가가 몸소 참가함으로써 그것은 가능하다.”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문학의 토양은 노동자 농민 등 근로 대중의 구체적인 삶이고, 그것의 예술적 원천은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인간의 투쟁과 노동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문학을 하고자 하는 청년 학생 노동자들에게 드리고 싶은 유일한 말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노동과 투쟁 그 한 가운데에 너 자신을 전면적으로 참가시키라.” 이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문학 작품이 그 가운데서 저절로 나오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문학의 내용과 변혁운동의 내용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최고의 문학은 혁명문학입니다. 나라의 구성원 중 절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이 몇 안 되는 세력의 착취와 억압 때문에 노예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때에 민족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문학 말고 또 다른 위대한 문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 학생 노동자들은 민족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의 최전선에 복무함으로써 자기의 시대적 사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고 뛰어난 문학 작품도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입만 입인감?
십여 년 전 어느 봄날의 일이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친구가 소개해 준 절을 찾아 산길을 걷고 있는데 저만큼 골짜기에서 한 노인이 집 앞에서 무엇인가를 심고 있었다. 나는 절로 가는 길을 묻고자 노인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은 내가 아주 가까이 다가가도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 무슨 나무인가를 심고 있었다. 귀가 먼 늙은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노인 곁으로 바싹 다가가서 꽤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노인은 앉은 채 고개만 내 쪽으로 돌렸다.
“뉘시오. 이른 아침부터 이 산중에?”
노인은 이곳에 사는 산지기였다. 그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그는 그 30여 년 동안 ‘낼모레 저승사자가 잡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할망구’와 함께 산지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 심고 있는 나무는 감나무였다.
“할아버지 따먹을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이런 산중에다 감나무는 뭣하려고 심어요?
노인은 대답은 간단했다.
”내 입만 입인감? 아무라도 와서 따먹으면 그만이제.“
나무라는듯한 노인의 대꾸에 나는 여간만 부끄럽지 않았다. 내 깐에는 사람들이 협동하여 한 해의 노동을 끝내고 콩알 하나라도 수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둘로 쪼개 나눠 가지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왔는데, 그런 내가 노인의 생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질문을 하여 설익은 내 속을 내비쳤던 것 같아서였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곳에는 십여 년 넘게 자란 감나무가 네댓 그루 있었다. 그래서 절을 찾는 사람들이 고개를 넘기 전에 여기서 잠시 쉬면서 감 몇 개씩을 따먹고는 했는데, 노인에게는 그게 그렇게 모양이 좋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만나 그 나무들이 모두 얼어 죽어버렸다.
노인은 다시 감나무를 심을 양으로 호미를 잡았다. 나는 노인의 허락을 묻지도 않고 괭이를 집어들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하는 육체노동이었다.
가을을 끝낸 들녘에서
감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때
그때 사람 사이 좋은 사이
그때 우리 사이 아름다운 사이
이따위의 생각을 떠올리면서 나는 노인과 헤어져 절을 찾아 고개를 넘었다.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위치 때문에 광숙이가 가족들로부터 여간 시달림을 받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오. 이에 대해 나로서 이러쿵저러쿵 할 말이 없을 것 같소. 또한 그럴 성질의 것도 아닌 것 같고요. 다만 나로서 그대에게 보내고자 하는 말은 사랑이란 호락호락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오. 한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있고, 물을 건너면 파도로 사나운 또 하나의 바다가 있듯 우리의 사랑의 길은 고달프고 멀다는 것, 그러니 산이라면 넘어주고, 물이라면 건너주겠다는 심정으로 우리의 애틋한 사랑을 키워갑시다. 순간마다 나는 그대에게 입맞춤으로 소낙비를 보내고 있소.
그대에게 내가 화를 냈다고 했는데 잘못된 것이오. 보다 그대를 사랑했을 뿐이오. 당신은 글에서 내가 조금은 섭섭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뿌리 깊은 그대의 관념성과 소시민성과 리버럴리즘일 것이오. 하나 이것 또한 나로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오. 음악을 듣고 꽃을 좋아하고 종교에 의지하고…… 어찌 내 이런 그대의 감성과 서정성을 탓이나 하겠소. 나도 어엿한 한 시인인데 말이오.
그대 어린 시절로 추억들은 나로 하여금 내 어린 시절의 일들을 떠올리게 하였소. 기뻤소. 즐거웠소. 속편은 좀 길게 써서 보내주시오.
당신과 함께 옛 추억을 되살리며 시골의 들길을 걷고 싶소. 그때가 언제가 될는지 난 모르오. 난 모르오. 아, 그러나 이제 나도 이처럼 외로울 때, 고적할 때 잡을 손이 있고 부를 이름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가! 가뭄의 굵은 빗방울이 대지에 박히듯 내 뜨거운 입술이 그대의 마른 몸에 박힐 날이 언제일런고!
다산의 허위
당신 편지 쭉 받고 있소. 아무 탈 없이 건강하다니 우선 다행이오. 4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글을 써 보겠다는 당신의 의지에 격려를 보내오. 구체적 사실(史實)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시오. 어떤 인물을 추상화하는 것만큼 역사 소설에서 해독을 끼치는 것은 없다오. 탄주곡(歎奏曲)을 청중 앞에 선보였다니 반가운 소식이었소. 우리가 그리는 궁극의 현실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복궐상소곡(伏闕上疏曲)인들 어떻겠소? 나는 청교도적인 금욕주의자도, 주자학자적인 명분론자도 아니오. 십자가에 스스럼없이 목을 들이미는 성자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데도 의연한 자세로 독배를 마시는 철인도 아니오. 나는 그 모든 것이오. 우리가 바라는 궁극의 현실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당신은 다산(茶山, 정약용)의 유배 생활을 추상화해서 얘기하였더군요. 그러나 당시의 유배 생활의 내용이란 지금의 나의 옥살이와는 하늘과 지옥의 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오. 고산(孤山, 윤선도) 같은 이는 유배지인 보길도에서 상놈들에게 노 저으라 해놓고 자기는 소위 유배 문학의 백미라고 떠들어대는 <오우가(五友歌)>를 지었다 하오. 그는 또한 양반 신분으로서 갖은 가렴주구 때문에 섬 국민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하오.
당시의 유배 생활이란 요즘 우리가 말하는 주거 제한과 공민권이 박탈된 것밖에 없고 그 외는 양반으로서 갖은 향락을 누리고 살았던 것이오. 갖은 토색질을 다했던 것이오. 다산만 해도 생전 처음 보는 상놈 생활에 눈이 조금은 떠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위대한 유산을 남기긴 했으나 그 역시 양반으로서 상놈인 종을 시켜 가마를 타고 유배지를 전전했을 뿐만 아니라 또 종을 시켜 산을 파헤쳐 차[茶]밭을 만들어 상놈들은 생전 맛보지도 못한 차를 달여 먹어가며 다론(茶論)을 썼다 하오.
뿐인가! 당시 삼남 지방에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을 때 그는 이것을 동정은 하나 지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오. 그의 시문학이라는 것도 상놈들의 생활을 노래하기는 하였으나 양반이기 때문에 상놈이 쓰는 언문이 싫다 해서 한시를 읊었지 않소. 상놈에겐 아무 상관없는 문학 말이오. 역사적 인물을 결코 추상화하지 마시오. 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차차 알게 될 것이오.
숙이, 한 사람이 아는 것은 극히 적다오. 겨우 열 길의 물속을 알고 밑 모를 심연 속으로 빠지고 마는 게 사람이오. 겨우 열 폭의 바위를 알고 수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마는 게 우리네 사람의 일이오. 이런 극히 작은 것도 아주 느리게나 알기 때문에 결국 질문만 하다가 죽고 마는 것이라오. 그래서 나는 광숙이에게 노래하는 거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고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열이면 열로 손잡고 가자
천이면 천으로 운명을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물이라면 건너주고
물 건너 첩첩 산이라면 넘어주자
서산낙일(西山落日)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가시밭길 하얀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본질
덕종에게.
며칠 전에 박 선생이 이곳을 다녀갔다. 지금까지 한 오 년 다녔던 직장을 일주일 전에 그만두었다고 하더구나. 이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니까 주위에서 부추김도 있고 해서 소설이나 써볼까 한다고 막연한 대답이더라. 늘 글이라는 것을 써야겠다고 벼르면서도 그 일이 잘 안 되고 있는 줄 알고 있다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는지 두고 볼 일이다. 글이라는 게 쉽게 씌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말이다.
박 선생을 만날 때마다 형님 집에 가끔 들려보라고 부탁하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들려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형님 집에 가면 갑갑하다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다. 형님 사는 것이 딱하고 그래 형님네 식구 대하기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민망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형님 나이 오십 언저리일 터인데 아마 힘 펴고 살 가망이 없는 것 같구나. 고향 땅에서 내몰려 서울살이한 지가 이십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살아보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갖은 고생을 다한 줄 아는데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이랴. 노동력이 있는 조카들이 셋이나 있으니 형님 내외의 건강이나 늘 좋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박 선생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청사’ 출판사에서 낸 시집이 조금 팔려 인세를 받았고 선후배 문인들이 나더러 쓰라고 얼마간의 돈을 주었다는구나.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내 시집이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더라. 시집이 팔리고 새로 나오면 누구나 우선 기쁘기 마련일 터인데 나는 그렇지가 않구나. 오히려 부끄러움이 앞서고 심지어는 죄스러움마저 드는구나. 그것은 내 시가 결점투성이고 거기다가 시로서 거의 미완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회가 있으면 그것들을 손질해서 다시 독자들에게 보여줘야 면목이 설 텐데 그럴 기회가 언제쯤이나 오게 될는지……. 아직은 캄캄한 밤이다.
덕종아, 인간은 자연을 자기에게 이롭게 바꾸는 노동을 해오면서 인간 자신도 바뀌어왔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자연과 싸우면서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싸운다는 것은 자연에 인간의 노동을 가한다는 것이겠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일(노동)을 하건 혼자서 하는 것은 아니고 또 할 수도 없는데, 그래서 반드시 여럿이서 협동으로 노동을 하기 마련인데, 언제부터인가 노동의 협동해서 빠져나온 인간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집단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었겠다. 처음에는 육체적으로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제 스스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않고 타인의 노동의 산물로 살아가게 되었다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과 남의 노동을 빼앗아 먹고 사는 사람으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이겠다. 아니 이 말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제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제 노동의 산물을 빼앗기면서 살아갔다고 해야겠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말을 하냐면 위 글 속에서 내가 이곳에 갇혀 살게 된 이유와 원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볼 때 덕종아,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사는 자연과 사회를 자기들 유리하고 편리한 대로만 개조하려고 하더구나.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들 유리하고 편리하게 자연과 사회를 변혁하려고 하면 인간이 지금까지 고안해낸 모든 수단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억압하더구나. 간단히 말하자.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편이다. 앞에서 나는 인간은 노동을 해오면서 성장해 왔다고 했는데, 즉 이것은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볼 때 지금 우리 사회는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인간적인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화가 되는 것이다. 내가 제 노동으로 겨우겨우 살면서 제 노동을 빼앗기고 있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눠 갖고자 함은 그들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쓰잘데없는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는 느낌이다. 그만하자.
부서지는 파도로 밤은 더욱 빛나고
부서지는 파도로
밤은 더욱 빛나고
바위로 그늘진 야산에서
나는 본다
땅으로 열리는 새벽을
산불 쓴 눈으로 나는 본다
그 자리에 지난여름
누군가의 힘으로 싹둑
모가지가 짤린 바로 그 자리에서
싹은 다시 돋아 파릇하게 돋아나
더욱 튼튼한 몸으로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 지난겨울
누군가의 무게로
풀은 다시 일어나 무성하게 어우러져
더욱 팔팔하게 나부끼고 있다는 것을
◎ 맹문재 엮음, ≪김남주 산문 전집≫, 푸른사상, 2015
☞ 저자 김남주는 1945년(호적상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전남대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2010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산문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시와 혁명』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번역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아타 트롤』 『은박지에 새긴 사랑』 등이 있다.
1972년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유인물) 《함성》을 제작해 유포한 뒤 이듬해 《고발》로 확대하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하다가 국내외의 석방 운동에 힘입어 1988년 12월 석방되었다.
1994년 2월 13일 타계해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되었다.
신동엽창작기금, 단재상(문학 부문), 윤상원상, 민족예술상, 파주북어워드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 엮은이 맹문재는 편저로 『박인환 전집』 『김명순 전집-시·희곡』 『박인환 깊이 읽기』 『김규동 깊이 읽기』 『한국 대표 노동시집』(공편) 『이기형 대표시 선집』(공편),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 『지식인 시의 대상애』 『현대시의 성숙과 지향』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등이 있음. 고려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