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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과 한 남자의 치열한 기록! ≪윤한봉 회고록-망명≫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6-05-05 05:37
  • 조회110
  • [보도자료]
  • 2026-05-05

윤한봉 회고록-망명

 

 

민주화 운동과 한 남자의 치열한 기록!

윤한봉 회고록-망명. 저자의 자전적 고백은 지난 세월 아픔의 연속 속에서 성장한 그 빛나는 정신의 실체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70년대 이래 대표적 민주화 운동가 중의 한 사람으로 전남대 재학 중인 74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르며 민주화 운동에 앞서온 저자의 인생이 펼쳐진다.

 

칫솔 하나 양말 한 켤레 속옷 한 벌 약병 하나, 이것이 저 강을 건너기 직전까지 그가 소유한 유일한 재산이었다. -화가 홍성담

 

윤한봉은 광주항쟁이 낳은 전설적 인물이다. 그의 밀항 소식이 귓속말로 오갈 때는 진위를 모두 손에 땀을 쥐었고 사실로 확인되자 역시 하며 모두 한숨을 돌렸다. 그가 지핀 민주화의 불길은 미국이라는 벌판에서 동포들의 가슴에 타올랐고 그것이 유럽으로 일본으로 번졌다. -소설가 송기숙

 

그가 택한 형극의 길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화물선 선창의 밀폐된 공간에 갇혀 한 달 넘게 태평양을 건너야 했던 윤한봉의 경험은 서양 근대 최악의 범죄적 역사인, 아프리카 대륙과 남북 미주를 왕래한 노예선을 추체험하는 과정이었다. -언론인 임재경

 

 

책을 펴내며

 

그립고 또 그립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습니다. 우리 삶 속에 우리 가슴에 언제나 새롭게 새롭게 살아납니다. 고 윤한봉 선생의 열정과 사랑과 민족애, 그 흔적을 더듬고 기억을 매만질 때마다 우리 자신이 언제나 새롭게 나는 체험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윤한봉 선생이 13년 전에 펴낸 운동화와 똥가방-5·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의 미국정치 망명기를 다시 펴냅니다.

2007년 선생이 타계한 뒤 선생의 책을 보고자 하는 요청들이 계속 있어서 일부분 수정을 거쳐 윤한봉 회고록-망명이라는 제목으로 펴내게 된 것입니다. 운동화 한 켤레와 최소한의 생필품만 들어있는 가방 하나가 전 재산이었던 그분의 삶과 정신을, 광주항쟁과 민족통일, 청빈과 겸손, 뜨거운 민족애와 민중에 대한 사랑을, 이 책이 조금이라도 더 전할 수 있기 바랍니다. 책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책을 읽을수록 우리는 그분에 대한 갈증으로 목마를 것입니다. 허나 이 귀한 책과 더불어 윤한봉이라는 한 혁명적 인간의 초상이 역사 속에 굳건하고, 우리 가슴과 삶 속에 길이 살아 숨 쉴 수 있기를 염원해봅니다.

20095합수 윤한봉기념사업회이사장 문규현

 

책머리에

 

나는 721017일의 소위 유신쿠데타 때부터 바다처럼 민주와 자주와 통일과 평화의 수평선을 향해 그리움을 안고 쉴 새 없이 굽이쳐 다녔다. 제적, 고문, 교도소, 현상수배, 만리타국이 앞을 가로막고 분열의 먹구름과 중상모략의 폭풍이 시야를 가려도 나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수평선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더 빨리 가기 위해 밀고 부딪치는 몸부림을 계속해 왔다.

이글은 굽이치고 몸부림쳤던 지난날의 한때를 기록한 것이다. 나는 나를 숨겨주고 밀항탈출 시켜준 분들에게 12년 망명생활과 해외운동에 대해 보고도 드리고 전두환 노태우 일당의 탄압과 DJ의 중상에 영향을 받아 지금도 나를 경계하고 있는 분들에게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5·18 관련 내막과 밀항탈출 과정과 귀국 후의 생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또한 나는 나이 오십이 다 된 내 인생의 마무리 차원에서, 새로 시작할 일의 준비를 위해서 잠시 지난날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썼다. 독자들에게 실망이나 안 주었으면 좋겠다.

-96910일 윤한봉

 

 

밀항

 

마산으로

 

1981429일 아른 아침이었다. 후배 정용화가 도피처인 서울의 석달언 씨 집으로 나를 불쑥 찾아왔다.

갑자기 웬일이야?”

형님, 지금 당장 고속버스로 마산으로 내려가셔야겠습니다.”

마산?”

오늘 배를 타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용화는 마산에 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과 만날 시간, 장소를 알려 주었다.

형님 혼자 내려가면 위험하니까 은경이와 동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은경이한테 연락을 취하고 광주에 들러 볼일 보고 마산으로 가겠습니다.”

용화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황급히 떠나갔다. 김은경은 당시 내 도피 과정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도맡아 해주던 후배였다.

한 시간 후 은경이가 왔다. 그동안 방구석에만 처박혀 지내 얼굴이 해쓱하게 여윈 나는 병원에서 막 퇴원한 환자 행세를 하기로 했다. 은경이는 나의 여동생 행세를 하기로 하고 함께 고속버스로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에 도착해 만나기로 한 장소에 정확히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갔다. 나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삼미사의 무역 화물선 표범호(Leopard)2등기관사 정찬대와 3등항해사 최동현,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부인들이었다. 그 두 선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밀항시키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었다. 정찬대는 74민청학련사건때 같이 감옥살이를 한 광주일고 후배 정찬용(당시 거창에서 농민 운동)의 동생이었고, 최동현은 나의 동지이자 매제인 박형선(건설업)의 고향 후배였다. 한없이 장하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선 찬대와 동현이는 말할 것도 없고, 만약 탄로라면 남편들이 어떤 고초를 겪게 되고 가정에 어떤 피해가 올 줄 뻔히 알면서도 흔쾌히 찬성한 두 부인의 밝은 얼굴, 특히 임신 5개월째라는 동현이의 부인을 보면서 나는 크게 감동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5·18이 비록 패배했지만 벌써 내일의 큰 승리를 준비하고 있구나라고.

 

저녁이 되자 동현이가 와서 조금 전에 배가 우리나라 영해를 벗어났다고 알려 주었다. ! 내가 조국을 떠나왔구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벽에 기대앉아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왜놈들에 윤간당해 대들보에 목매달고

되놈에게 강간당해 혀 깨물고 자결하고

양놈에게 능욕당해 우물 속에 뛰어들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세 끼 굶은 새끼들 위해 옥수수 하나 훔쳐오다

머리채 휘둘러서 밭고랑에 처박힌 채

새끼들 울며불며 재 넘어올 때까지 오열하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앓아누운 지아비의 눈치 보며 빠져나와

이 집 저 집 구걸하다 개에 물려 절뚝인 채

보리쌀 한 되에 옷을 벗고 이 악물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병든 새끼 등에 없고 허겁지겁 길 건너다

출정 길에 재수 없다 단칼에 두 토막 나

길바닥에 뒹굴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환곡 제때 못 갚았다 곤장 맞아 지아비 잃고

단돈 열 냥 못 갚아서 다 큰 딸년 빼앗기고

나졸 보면 혼겁하고 양반 보면 치를 떨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있겠습니까?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 3년 죽은 듯이 참고 살다

시앗 보는 지아비도 하늘처럼 섬겼것만

아닌 밤중 소박맞고 친정집에 찾아갔다

출가외인 호통 아래 문전에서 되쫓기어

밤새도록 달을 보며 골목 안을 서성이든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손톱 끝은 바늘로 허벅지는 송곳으로

젊음 홀로 보내시며 피눈물로 키운 딸년

찬물 놓고 여의던 날 거울 앞에 앉으신 채

주름살 헤이시며 눈물짓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삼월이 춘자 명월이 하야꼬

세월 따라 이름 바꿔 떠돌면서 사시다가

순이를 낳고부터 함평댁이 되었는데

딸년마저 이름 바꿔 에레나가 되었다며

보내온 돈 움켜쥐고 통곡하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빨래, 베틀, 디딜방아 날 가는 줄 모르다가

문고리 잡고 몸을 풀고 미역국 생각도 못 해본 채

허둥지둥 호미 들고 뒷밭으로 나가셔서

이 고랑에 젖 한 방울 저 두둑에 눈물방울

다듬이질 밤이 깊어 팔만 남고 잠이 들고

바느질 시작하니 손만 남고 잠이 들어

잠결에 찔린 손끝 피 맺기 전 첫닭 울자

갓난 새끼 부여안고 흐느끼던 어머님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친정 아비 갑오년에 죽창 들다 맞아 죽고

시아비는 의병 나가 머리카락만 돌아오고

지아비는 항일투쟁 만주벌에 귀신 되고

큰아들은 징용으로 외동딸은 정신대로

작은 아들 6·25에 큰 손자는 4·19

 

어머니!

뜬눈으로 밤새우고 애태우며 찾아갔다

하나 남은 막냇손자 이를 갈며 키운 손자

민주 통일 부르짖다 칼에 찔려 즉사하자

굽은 허리 곧추 펴고 고함치며 달려들다

앙상한 팔 휘두르며 악을 쓰며 달려들다

흰 고무신 흰옷인데 흰머리만 흰머리만

 

어머니!

부릅뜬 두 눈에 백년 한 남기고 가

무등산 젊은 원혼들의 피투성이 등에 업혀

백두 한라 넘나들며 울부짖는 어머님을

어떻게 제가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꼭 돌아오겠습니다.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5월 영령들이시여!

이 못난 도망자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 못난 놈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또 열심히 활동해서 살아남은 죄, 도망친 죄를 씻고

떳떳이 돌아올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시고 격려하여 주옵소서!

 

동지들이여!

이 못난 도망자를 용서하소서

용서받을 만한 실적을 남기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소서

 

저를 아끼고 보호해 주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이여!

그 애정 그 정성 가슴에 깊이 새기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다시 뵈올 그날까지 내내 평안하소서

진달래 산천아! 무등산아!

 

조국의 영해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밀어닥쳤던 슬픔과 회한과 분노의 파도가 가라앉자 나의 생각은 어느덧 7910월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상한 일들

 

나는 동현이와 상륙허가증을 가지고 태연하게 병실에서 걸어 나갔다. 선원들은 모두들 상륙 준비 때문에 방에 들어가 있는지 배에서 내릴 때까지 나는 단 한 사람도 보지를 못했다. 9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배에서 내려 미국인 수위실 앞을 태연하게 지나갔다. 수위실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수위실을 지나서 보니 육지 쪽으로 긴 잔교가 놓여 있었다. 육지를 향해 잔교 위를 걷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흔들리는 배 안에 있어서 그런지 몸이 약해져서 그런지 어지럽고 휘청휘청해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긴장한 채 천천히 걸었다. 펌데일 부두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민가도 안 보이고 사람도 안 보였다.

마침내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35일 만에 육지를 밟았다. 사방은 고요할 뿐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한참 후에 동생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일어나서 가지고 있던 칼들을 어두운 밤바다에 던져 버렸다. 805월 하순부터 몸에서 떼지 않고 가지고 다니던 칼들, 최악의 경우 한 놈이라도 죽이고 자살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던 칼들, 목욕할 때도 입에 물었던 칼들, 밤마다 머리맡에 두고 잤던 그 칼들을 어두운 밤바다에 힘껏 던졌다.

 

 

망명 1

 

대한민국 경찰 최초, 최대의 실수!

 

10일 간의 단식농성을 마치고 체력을 회복한 후 나는 장기적인 해외운동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본격적인 궁리를 시작했다. 그러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동현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일본 부근을 항해 중입니다. 국내에서 사건이 터졌으니 밖에 나다니지 말고 신변 안전에 신경 쓰십시오. 자세한 것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뭐라고?”

나는 깜짝 놀랐다. 무슨 사건이 터졌기에 이곳에 있는 나까지 신변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궁금증 때문에 속을 태우며 다음 소식을 기다렸다. 12월 초에 마침내 광주에서 소식이 왔다. 소식을 정리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8210월에 전북 군산에서 이광웅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교사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전두환 정권을 비난하고 북을 찬양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고문 수사를 하던 경찰은 이광웅 선생이 도피 중이던 나를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흥분했다. 수사는 갑자기 나를 체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의 도피처 한 곳이 드러나자 연이어 매듭이 풀리며 나에게 도피처를 주선했거나 제공해주신 분들, 그리고 도와주셨던 분들 중 20여 명이 줄줄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나를 잡기 위해 경찰은 정용화, 최권행, 김은경, 홍희윤 씨(소설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젖먹이 외조카 지웅이를 업은 여동생 경자와 남동생 영배까지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가 두들겨 팼다. 동생 경자와 최권행은 전두환 일당이 악랄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감지하고 전율했다. 전두환 일당이 윤한봉은 5·18 이후 월북해서 밀봉교육을 받고 내려와 지하에서 암약 중 체포되었다는 각본을 만들어 놓고 그 각본에 따라 국내 운동권, 그중에서도 광주 전남 지역 운동권을 나와 연결시켜 때려잡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나를 체포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는 것이다.

안 되겠다 싶은 동생 경자는 이렇게 말해 버렸다.

우리 오빠는 미국에 망명했어요.”

그러자 경찰들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라.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대한민국 경찰을 우습게 본다며 호통까지 쳤다.

그래서 경자가 다시 말했다.

조아라 장로님이 미국 가셨을 때 오빠를 만나고 왔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그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얼굴색이 달라지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824월경에 미국을 방문하신 조 장로님을 LA에서 잠깐 뵌 적이 있었다.

반신반의한 그들은 허겁지겁 조아라 장로님, 강신석 목사님, 정찬대, 최동현 등을 차례로 연행하여 닦달하기 시작했다. 강신석 목사님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보좌관이 와서 나의 신분을 확인해 갔다는 사실까지 밝히자 그들은 망연자실했다. 아연실색한 내무장관 노태우가 전두환을 찾아 청와대로 뛰어가는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결국 전두환 일당은 연행되었던 모든 분들에게 윤한봉이가 밀양 탈출하여 미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한다는 각서를 받아내고 일제히 석방시키고 말았다. 동현이와 찬대는 그때 선원수첩을 빼앗겨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게 되었다.

적들은 내 문제가 미국과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피해야 했고 또 자신들의 낭패를 숨겨야 했기 때문에 사건을 백지화시켰던 것이다. 당시 적들의 낭패감이 얼마나 컸던지 경찰 고위 책임자 한 사람이 나의 밀항탈출 사실이 최종 확인되자 대한민국 경찰 최초, 최대의 실수!”라고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고 하니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엉뚱하게 사건이 풀린 바람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도피와 밀항을 도와주신 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그동안 계속 신분을 숨기고 가명을 쓰는 생활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의 머리와 발목을 잡고 있던 큰 걱정거리 하나가 해결되었다. 나도 이제 내 신분, 내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고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적들은 나를 못 잡게 되자 분풀이라도 하듯 이광웅 선생님을 비롯한 연행자들에게 엄청난 고문을 가해 사건을 조작한 후 12월 초순에 이렇게 수사를 발표했다.

이광웅 등 9명이 윤한봉으로부터 사회주의 폭력 혁명을 교사받아 이적단체인 오송회를 결성 암약 중에 일망타진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로 치를 떨었다.

 

80년 겨울이었다. 나는 이광웅 선생님의 매제인 서울의 신옥재 씨 집에서 약 3개월간 숨어 지냈다. 군산제일고 국어 교사이며 시인인 이광웅 선생님을 나는 그 집에서 처음 만났다. 방학을 이용해서 누이동생 부부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이광웅 선생님은 꽃잎 위의 이슬 같은 맑은 영혼을 지닌 분이셨다. 대화를 하면서 선생님은 광주 학살의 충격으로 전두환 일당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선생님께 몇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분노만 하고 계실 것이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본격적인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들과 학생들의 의식화, 조직화가 필요합니다. 효과적인 운동을 위해서는 군산에서 고립된 운동보다는 전주 지역 운동권과 연결해서 해야 합니다. 전주의 문정현 신부님을 소개할 테니 꼭 한번 찾아가 보시죠.”

그 얼마 후 몇 분의 교사, 친지들과 함께 이 선생님이 다시 찾아오셨기에 나는 처음 보는 분들 앞에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민주화 운동 일반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어떻고 폭력 혁명이 어떻고 이적단체가 어떻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후에 이광웅 선생님은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후 전교조 활동을 하시다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운동화와 똥가방

 

나의 생활은 민족학교 초기에는 좀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해결되어 85년부터는 별걱정 없게 되었다. 생활이라 해봤자 가족도 없고 집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통장이나 수표도 없는 데다 술도 체질이 특이해 전혀 못 마시기 때문에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되고 담배만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조국에서 운동할 때처럼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운동화나 고무신을 신은 채 드넓은 미국 땅을 누비고 다녔다. 그 가방에는 손톱깍이, , 이쑤시개, 칫솔, 치약, 양말, 속옷과 필기도구, 자료철, 책 한두 권이 들어 있었는데 모두들 그 가방을 똥가방이라 불렀다.

 

헛된 꿈

 

88년 말이 되자 조국의 국회 내에 광주특위가 구성되고 5·18 학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5·18 민중항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어정쩡하게 규정되고 5·18 관련으로 투옥되었던 모든 분들이 사면, 복권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 회복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학살 원흉인 노태우 정권하에서이긴 했지만, 여소야대가 된 국회의 활동에 힘입어 5·18 문제가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정국 변화에 발맞추어 그동안 광주의 옛 동지들에 의해 개인적 차원에서 조용히 진행되어왔던 나의 귀국추진운동도 전국적 차원의 조직적 틀을 갖추고 전개되기 시작했다.

11월에 광주에서 귀국대책준비위원회가 발족했고, 1213일에는 서울에서 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 그리고 나의 법적 신분 확인을 위한 대정부 서면질의 등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88년 말에 광주의 옛 동지들이 날더러 광주 청문회에 나가 증언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어봐 그렇게 하겠다고 흔쾌히 응낙했다. 광주에서는 단순히 청문회의 증언만을 생각한 듯했으나 나는 청문회 증언을 귀국 기회로 생각하고 속으로 흥분했다.

 

‘5·18 관련 수배자는 나밖에 없다. 투옥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사면 복권이 되었으며 5·18 광주민중항쟁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까지 부르고 피해자 보상과 명예 회복이 거론되고 있는 마당에 아무리 노태우 일당이 나를 미워하여 귀국 허용을 안 해주고 싶어도 여소야대 국회의 광주특위에서 나를 증인으로 채택하면 나에 대한 수배를 해제하거나 한시적으로라도 귀국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귀국하여 증언한 후 그대로 눌러앉아 버려도 체포 투옥하기에는 너무 정치적 부담이 커서 어쩌지 못할 것이다. 설혹 투옥한다 할지라도 들어가 눌러앉아 버리자.’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증인으로 곧바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차분히 인사하고 갈 겨를이 없을 것 같아 서둘러 각 지역을 돌며 귀국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에 나의 청문회 증언이 거부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광주특위에서 틀림없이 나를 증인으로 채택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5·18 관련 최후의 사법적 미처리자이고 수배 사유도 내란 주요 임무 종사와 계엄법 위반인 데다 범죄 내용도 내란을 일으키기 위해 DJ로부터 돈을 받은 정동년 씨가 그 돈 중 일부를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 돈을 학생 시위 배후 조종에 썼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DJ5·18을 연결시킨 전노 일당의 조작 진상을 완전히 밝히기 위해서라도, DJ와 정동년 씨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나의 증언도 들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광주 동지들도 들어올 준비를 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광주에서도 각 당에 나를 증인으로 채택해 달라고 요청했고 5·18 수괴로 몰렸던 정동년 씨도 청문회 증언을 하면서 나의 증언을 꼭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국추진위원회에서도 성명서를 통해 나의 청문회 증언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광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날아왔다. 평민당 소속 이모 위원이 내가 청문회 증언 때 DJ의 명예와 권위에 손상을 주는 발언은 안 하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증인으로 채택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나에게는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면서 DJ를 모독하는 사적 발언을 할 필요도 생각도 없었지만, 역사적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적 각서를 조건으로 제시하는 데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 일 이후로도 나는 내가 증인이라 채택되리라 믿고 귀국 준비를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증인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귀국의 꿈은 일장춘몽,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때도, 귀국한 지금도 내가 증인으로 채택되지 못한 정확한 이유를 아직 모르고 있다.

 

 

망명 2

 

평화를 위한 대행진

 

나는 미국인들과 국제사회에 Korea의 분단 문제와 군사, 핵 문제의 심각성과 그에 따른 코리언의 고통과 분노를 알리는 것이 해외 운동이 해야 할 중요한 사업 활동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 방도에 대해 궁리한 끝에 84년에 백두에서 한라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구상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가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 문제를 한청련 내부에서 의논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김에 행진까지 해버리면 굉장히 많은 경비절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2월에 열린 한청련 한겨레의 합동회의에 그 문제를 상정하였다.

 

  •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897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177개국 22,0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진행된 축전이다. 진보성향 및 좌익계열에 속하는 세계청년학생들의 단결과 친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정치토론, 연대성집회, 상봉모임 등 정치행사와 문화예술활동, 체육경기 등의 행사가 진행되었다.-인용자 주

 

(1989) 721일 백두산 정상에서 출정식을 한 국제평화대행진단은 한청련의 사물패를 앞세우고 판문점을 향해 7일간의 대행진을 시작하였다. 같은 날 미국의 뉴욕에 있는 UN 본부 앞에서 출정식을 한 미주평화대행진단도 워싱턴 DC의 의사당을 향해 7일간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국제평화대행진에는 북미주에서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28, 중남미에서는 니카라과를 포함한 6개국에서 8,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는 필리핀을 포함한 7개국에서 30, 유럽에서는 서독을 포함한 8개국에서 11, 중근동에서는 팔레스타인에서 1명 등 참전 16개국을 포함한 30개국의 대표 85명의 타민족 형제들과 중국, 소련, 독일, 캐나다, 미국, 일본에 거주하는 해외 동포 113, 그리고 북부조국 동포 70명과 동포 2(문규현 신부, 임수경 학생) 등 총 270명이 참가하였는데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한 나라는 미국(27)이었고 다음은 18명이 참가한 필리핀이었다. 타민족 형제들 중에는 수석 대표 다무 스미스 씨, 휠체어를 탄 브라이언 윌슨 씨, 80세의 분 셔머 씨와 같은 진보적인 평화 운동가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지만, 필리핀의 아트 발라가트 신부와 같은 민족해방운동가들도 상당수 있었다. 재미동포 행진단에는 생후 3개월 된 신보람부터 80세의 정만수 선생님 내외분까지, 그리고 2세인 노소윤 회원부터 혼혈 입양아 출신 윤복동 씨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 있어서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미국 사회의 빛과 그늘

 

미국 사회의 진보세력과 좌파세력

미국 사회에서도 진보세력과 좌파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50년대의 매카시 선풍 때 당한 사람들 중 생존해 있는 사람들과 60, 70년대에 반전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극우세력들의 협박과 압력 등 끈질긴 해코지에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정신질환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반전 운동을 했던 여배우 제인 폰다(Jane Fonda)80년대 후반에 자신이 직접 출연한 에어로빅 교습용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민간 극우세력들이 백화점의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그 테이프들을 자석을 이용해 지워버리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견디다 못한 제인 폰다는 내가 반전 운동을 한 것은 생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잘못했다는 내용의 공개 사과를 했고 그 후부터 테이프들은 수난을 면했고 말썽 없이 잘 팔려 나갔다.

그와 같은 집요한 탄압 때문에 그들은 공직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변호사나 의사가 되거나 사업에 투신해서 대부분이 성공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그렇게 성공해서 모은 엄청난 돈을 조직적으로 은밀하게 진보적인 운동을 돕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동안 상당히 활발하게 운동을 해왔던 미국의 제3세계 연대운동도 침체에 빠졌다. 그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기인한 제3세계 민족민주운동의 노선 변화와 위축 때문이었다. 평화운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냉전체제의 해체, 러의 핵무기 감축과 강대국들의 군비 감축이라는 객관 정세의 변화에 걸프전 당시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데에 따른 무력감 때문이었다.

70년대부터 침체되어 있던 소수민족 민권운동 또한 분열과 취약한 지도력 때문에 여전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미국의 진보적인 운동 전체가 활기를 잃고 있었다.

 

원주민

군데군데 아름다운 해변을 소유한 백인 부자들이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 놓고 인생을 즐기고 있을 때, 542개 종족의 190만 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원주민들은 백인 정부가 보호구역이라고 이름 붙인 철조망 없는 황량한 수용 구역에서 80% 정도의 실업률에 따른 가난과 알코올에 찌든 채 절망과 허무 속에서 슬픈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웃을 줄 모르는 인종의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귀국

 

12년 만에 귀국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회원들이 급히 구입해 놓은 양복과 구두를 거절하고 평소 입던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옷으로 골라 입고 평소 신던 운동화를 신고 똥가방을 맨 채 마지막으로 민족학교를 구석구석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민족학교, 나의 혼이 스며 있는 민족학교는 날더러 가지 말라며 자꾸만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눈물을 감추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똥가방 속에는 조국에서는 면으로 만든 옷값이 비싸다며 회원들이 사준 하얀 속옷 10여 벌과, 회원들이 비행기 안에서 먹으라며 비닐봉지에 담아 준 내가 좋아하는 호박죽과, 민족학교 뒤뜰에서 내가 직접 가꾸었던 풋고추가 들어 있었다. 나는 동행하기로 한 최진환 박사님, 강완모 한청련 부회장과 함께 눈물로 배웅해 주는 회원들을 뒤로하고 샘솟듯 눈물이 솟구쳤지만 애써 눈물을 감추며 LA 국제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조국에서 오신 손님들을 배웅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저곳을 통과해서 비행기를 타고 조국으로 돌아갈까하고 생각하며 수없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던 바로 그 검색대를 통과해서 묵직한 납덩이를 매단 듯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탑승구를 지나 비행기에 올랐다.

1993519LA발 서울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오르는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귀국길에 오르고서야 내가 우리 회원들과 얼마나 정이 깊이 들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추억 속에 명멸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비행기가 이륙한 후 2시간 동안이나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리고 12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서른네 살에 왔다가 마흔여섯 살이 되어 돌아가는구나.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중년이 되어 돌아가는구나.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원 없이 뛰다가 이제 돌아가는구나.

캄캄한 밤에 외항선에 숨어 타고 떠나온 조국에

백주 대낮에 보란 듯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구나.

떠나올 때는 36일이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12시간이구나.

떠나올 때는 화장실 바닥에 앉아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동행자들과 함께 좋은 의자에 편히 앉아 가는구나.

떠나올 때는 칫솔 하나 찬 빈털터리였는데

지금은 똥가방도 있고 회원들이 급히 모아준

몇천 불의 돈도 있는 부자가 되어 돌아가는구나.

그래 구속해 봐라, 덕분에 좀 쉬고 밀린 책도 좀 보자.

그리고 법정과 감옥에서 악착같이 싸워보자.

 

5월 영령들이여! 옛 동지들이여!

미국에 도착한 후 다짐했던 대로 살아남은 죄,

도망친 죄를 깨끗이 씻고 가기 위해 편안한 생활하지 않고

부끄럼 없이 살다가 돌아갑니다.

열심히 운동하다 돌아갑니다.

조국운동, 광주운동을 훼손하거나 더럽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운동하다 돌아갑니다.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고 배울 것은 배우고 갑니다.

세계에는 우리 민족보다 훨씬 더 한 많은 역사, 훨씬 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씨름하고 있는 인종과 민족과 종족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깨닫고 갑니다.

국제사회와 해외 동포사회에 대해서도 제법 배우고 갑니다.

정세분석 훈련도 열심히 하고 갑니다.

목욕도 한 달에 두 번씩만 하고 운전도 안 배우고

영어도 안 쓰고 침대에서 자지 않고 내 것을 갖지 않고

허리띠 안 풀고 12년을 살다 돌아갑니다.

몸이 좀 쇠약해지고 늙은 것 빼고는 변한 데 없는 촌놈 합수그대로 돌아갑니다

 

 

윤한봉, 윤한봉 회고록-망명, 한마당, 2009(개정판)

 

윤한봉(1948-2007)

일명 합수(合水. 70년대 이래 대표적 민주화 운동가 중의 한 사람. 전남대 재학 중인 74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르다 80518 광주민중항쟁 주모자로 수배, 도피 중 814, 동지들의 도움으로 화물선 레오파드호에 숨어 미국으로 밀항, 정치 망명자가 됨. 해외에서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재미한국청년연합’,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 ‘해외한국청년연합을 결성하여 탁월한 조직가, 운동가로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반전반핵 세계평화운동, 3세계 연대운동에 헌신함.

93년 수배 해제되어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 광주에서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하고 ‘518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는 등 활동 중, 밀항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여겨지는 지병인 폐기종으로 힘겨워하다 20076월 폐 이식수술 직후 합병증으로 타계. 그해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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