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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도연명 농사꾼 아나키스트 시인≫ 박홍규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6-02-22 08:08
  • 조회182
  • [보도자료]
  • 2026-02-22

내 친구 도연명 농사꾼 아나키스트 시인 박홍규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혁명가, 도연명

삶의 본질로 회귀하려는 모든 이에게,

도연명은 여전히 살아 있는 친구다!

 

머리말

 

권력과 교양을 겸비한 이들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많았다. 이를테면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평생 높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시를 짓고 거문고를 타며 술을 즐긴 인물이라 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불렸다.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백운선인(白雲仙人)이었다. 흰 구름 속에서 산다는 것인가, 흰 구름처럼 떠다닌다는 것인가. 그는 자기보다 800여 년 전 중국에서 살았던 도연명을 사숙하여 도연명의 글은 물론 그 생애까지 닮으려 노력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규보는 가문을 일으키고 명예를 크게 떨치고자 했던 권력 지향의 야심가였다. 출세주의자이자 보신주의자로서 당대 권력을 쥔 무신들이 부르면 언제든 응했고 기꺼이 권력에 봉사했다. 그런 점에서 권력을 거부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도연명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하다못해 술에 대한 표현도 도연명의 시는 그의 자연과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반영하는 반면, 이규보의 시는 현실의 어려움과 고뇌를 잊기 위해 낭만적이고 호방하게 술을 마시고 취하는 삶을 추구한다.

이규보만이 아니다 이인로(李仁老, 1152~1220)나 이색(李穡, 1328~1396), 정몽주(鄭夢周, 1337~1392)도 마찬가지다. 이인로가 도화원시를 모방하여 지은 청학동기몽유도원도와 마찬가지로 지배자들의 신선놀음이고 정신적 안식처일 뿐이다. 그들이 도연명을 존경하고 그의 시문을 읽었지만, 그것은 선진 문물의 독서에 불과했을 뿐 도연명의 귀거래나 시대 비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규보를 비롯한 몇 사람은 도연명을 아예 모르는 채 오로지 권력에 완벽히 탐닉해 무지하고 야만적인 삶을 산 이들보다는 나은 쪽이라 여겨질 수 있다. 소수나마 그와 같은 이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평가도 있긴 하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책은 도연명이 이규보를 비롯한 사이비 선비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밝혀 이 땅에도 참된 지식인들이 나타나기를 희망하며 쓰는 책이다.

 

한반도에 도연명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통일신라의 최치원(崔致遠, 857~908?)이었으나 그는 도연명을 시와 술로 흥을 누린사람으로 보았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도연명의 벼슬이 낮았다는 이유로 무시되다가 중국에서 높은 벼슬을 한 소동파(蘇東坡, 1037~1101)가 도연명을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받들자 고려에서도 별안간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는 당시 무신정권이 집권하여 사대부의 은둔생활이 유행한 점과 맞물려 생긴 기이한 현상이었다. 이어 조선시대에 와서 도가풍의 이백(李白, 701~762)이나 소동파가 경원시되면서 주희(朱熹, 1130~1200)가 유교적 시인으로 재조명한 도연명이 다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는 도연명처럼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는 것이 유행할 정도로 높았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유학의 대종인 주희의 성리학이 한반도를 지배했다. 주희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사대부의 전형으로 도연명을 거론하면서 특히 그 충절을 강조했다. 왕조가 갈리는 위기 시대에 도연명이 진나라에 충성하기 위해 송나라의 벼슬을 거부하고 은거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도연명이 벼슬 자체를 거부하고 권력 자체를 부정한 점에 대한 유교적 편견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중국이나 한반도에서는 오랫동안 절개의 충신도연명 관으로 유지되어왔다. 나는 이 점이 도연명에 대한 치명적인 오류라고 보고 이 책을 쓴다. 철저히 반권력적인 도연명을 철저히 권력적인 도연명으로 바꾼 것이 중국 주자학이고 조선 성리학이었다.

 

도연명은 365년에 태어나 42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62년을 살았다. 평균 수명이 30~40세 남짓이던 당시로서는 제법 장수한 셈이다. 하지만 그보다 거의 천 년 앞서 살았던 노자가 101, 공자가 72, 맹자와 장자가 각각 83세까지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짧은 생애다. 농사를 짓지 않았던 다른 도가 사상가나 사대부들과 달리 그가 평생 농사를 짓고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일까? 그래도 하찮은 사대부 집안 출신에 하찮은 벼슬이라도 3년 정도 한 하찮은 사대부이기에 일반 농민보다는 좀 더 오래 살았는지 모른다.

도연명은 흔히 자연시인, 전원시인, 은거시인, 생태시인, 생명시인, 음주시인 등으로 불린다. 그러나 나는 그를 농사꾼 아나키스트 시인으로 본다. 벼슬을 3년도 채우지 못하고 버린 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산 그는 권력이나 권위에 기대지 않고 평등한 농민 공동체를 지향한 아나키 유토피안이었다.

그는 공자나 맹자 같은 사대부로, 혹은 노자나 장자 같은 도사로 살 수 있었지만, 그것들이 참된 삶이 아니라고 보았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농사꾼이 되었고, 그들과는 다른 반권력의 삶, 곧 아나키즘의 삶을 실천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도연명의 작품이나 사상을 유교적이거나 도교적이라 규정하는 통념에서 벗어나 이 책을 쓰게 되었다. 굳이 제자백가 식 분류를 따르자면 그는 농가(農家)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제자백가 중에서도 농가는 유독 일찌감치, 그리고 완전히 잊혔다. 하지만 지금도 농가는 농민의 집, 농민의 삶을 가리키는 말로 살아 있다. 물론 오늘의 농사꾼이 도연명처럼 모두 아나키 농가의 후예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그 후예로 지각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나왔던 도연명 관련 책들과 달리 아나키 농사꾼의 시선에서 공감하며 쓴 도연명의 이야기이다.

도연명도 그러했다. 그는 자신이 공맹 사대부나 노장 도사만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과 다르다고 자부했다. 남들과 다름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자랑했고, 그것을 자신의 특징이자 능력이자 인격으로 삼았다. 사대부는 평생 벼슬을 좇는 자들이고, 도사는 산에 숨어 산신령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둘 다 농사와는 담을 쌓은 자들이다. 도연명은 유교와 도교에 밝았고 사대부나 도사로 출세할 수 있는 길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농사꾼의 삶을 선택했다. 그것이 옳은 삶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길이 괴롭고 힘든 일이며, 굶어 죽기 십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굶었지만, 그는 그 삶을 기꺼이 택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농사꾼 아나키스트로 부르며, 그런 도연명이 좋아서 그를 내 친구 삼아 이 책을 쓴다.

 

도연명은 지금 중국의 중남부, 장강(長江, 우리는 흔히 양자강이라고 한다) 서쪽에 있어서 장시(江西)라는 성의 주장(九江)시에서 태어났는데, 도연명이 살았을 때 주장시는 시상(柴桑)과 팽택(彭澤)이라는 두 현이었다. 도연명은 40세에 팽택령(彭澤令)이라는 우리의 면장 정도인 마지막이자 평생 최고로 높은 벼슬을 했지만 80일 만에 그만두고, 그 뒤 41세부터 62세까지 21년 동안 농사를 짓다가 죽었다. 그전에도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었으니 그의 평생 직업은 농사꾼이라 할 만하다. 농사꾼이라는 말이 차별어라고 하면서 농민이나 농부나 농군이라고 해야지 않나, 하고 따질 분이 계실지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을 구성하는 단어 중 하나인 아나키스트라는 말에는 농사꾼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내가 아는 농사꾼 아나키스트는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도연명뿐이다.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참된 농사꾼은 모두 아나키스트다. 땅을 사랑하고 그 땅으로 먹고살며, 농사를 방해하는 것은 어떤 권력이든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 사람이 생겨난 뒤 지금까지 거의 그렇게 살았다. 인류 대다수는 농사꾼이었다. 대부분 글을 쓰지 못했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글로 남긴 농사꾼은 도연명이 유일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쓴다. 이 세상 모든 이의 조상이었던 농사꾼을 위해, 농사꾼의 목소리로 농사꾼을 대변해준 도연명에 관한 책을 쓴다.

 

도연명과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톨스토이(1828~1910)와 간디(1869~1948)는 여러 가지로 유사하다. 네 사람 모두 소박하고 독립적인 자유인의 삶을 추구하여 자연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간소(簡素)하고 결핍된 삶을 스스로 택해 자신들이 한 말이나 글과 똑같이 살았다. 바로 자발적 가난의 삶이고 반권력의 삶이었다. 지금 말하는 생태주의가 자연주의나 소농주의, 전원주의나 은거주의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지금 상황에서는 과거의 소농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는 만능 해결책이라 볼 수 없다. 그렇게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필요도 없다. 도연명은 1660년 전의 농사꾼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런 농사꾼으로 살기가 어렵다. 그들의 자발적 가난과 반권력을 닮아야 하지만 그들을 삶을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소로를 비롯해 내가 사숙해온 이들에 관해서 써온 글들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속의 스승이자 영원한 친구인 도연명에 관해 쓴 글이다. 그의 삶을 따라 다시 내 삶을 다 잡고자 썼다. 이글은 남은 생을 더 성실히 농사꾼 아나키스트로 살아가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1장 오류선생(五柳先生) 도연명

 

도연명은 농사꾼 아나키스트다

 

도연명은 단 3년 만에 벼슬을 그만두고 평생 업으로 농사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는 흔히 말하듯 자연과 전원에 은거했다는 뜻만이 아니다. 그는 도시에서의 벼슬살이보다 시골에서 자기 손으로 일구는 농사일이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든다고 믿었다. 왕을 포함한 모든 이가 농사꾼으로 살아야 한다는 평등한 삶의 원리를 그는 지향했다. 그러한 선택은 농업을 가장 중시한 농가(農家) 사상의 실천이기도 했다. 그는 왕이나 귀족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꿈꾼 도화원에는 그런 권력 계급이 없고, 국가도 없고, 따라서 국가가 백성에게서 강제로 걷는 세금도 없다. 요컨대 권력이 없다. 권력이 없기에 자유롭고, 사람들은 함께 자연 속에서 자치한다. 그런 무권력, 반권력을 말하기에 나는 도연명을 아나키스트로 본다. 그것도 농사꾼 아나키스트로 본다.

 

나는 도연명의 시를 농시라 부른다. 농사꾼이 농사에 대해 노래한 시이기 때문이다. 흔히 그의 시를 중국 전통의 하나인 은거문학이나 자연시’, ‘전원시로 분류하지만, 나는 그를 유일한 농시인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농시라는 말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도 그런 시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고려나 조선에도 도연명을 따르는 시인들은 많았지만, 그처럼 농사꾼으로 쓴 시, 농시는 없었다. 도연명의 농시는 양반들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풍월(風月)이 아니다. 그의 시는 농사꾼의 기쁨과 괴로움, 그 삶의 질감이 담긴 시. 그리고 그 정신이 가장 집약되어 나타난 글이 바로 자제문이다.

 

나는 죽는다

 

427년 시월 하늘이 차고 밤은 길고, 쓸쓸하고 스산한 바람 불어 기러기 남쪽으로 날아가고, 초목은 누렇게 시들어 떨어진다. 나 도연명은 이제 잠시 머물던 인생이란 여관을 떠나 본가로 영원히 돌아간다. 정든 사람들이 애절하게 슬퍼하며 오늘 밤 나를 제사 지내 떠나보낸다. 좋은 채소 차려 놓고 맑은 술을 따른다. 내 낯빛은 이미 어둡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 슬프다.

 

도연명에게 죽음은 모든 생명의 필연적인 과정일 뿐이고, 특별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담는 인생사가 아니다. 삶은 나그네가 잠시 들르는 여관일 뿐이고, 죽음은 나그네의 걸음이 끝나고 영원히 머물게 되는 본가(本家)에 불과하다. 본가이니 어쩌면 처음에 그곳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본가에서 태어나 밖에 나와 살다가 다시 본가에 돌아가 죽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본가에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본가는 무(). 그 무에서 태어난 유()가 결국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것이 삶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 힘든 나그넷길이 끝나 두려울 게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자연스러운 변화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출생도 사망도 그 변화 중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도연명의 사생관은 유교나 불교와 다르고 노장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를 이유로 도연명의 사생관이 일관적이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내 인생은 가난했기에 즐거웠다

 

드넓은 대지, 아득히 높은 하늘,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고 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사람으로 태어나 가난한 운명을 만났기에 밥그릇은 자주 비고 거친 베옷으로 겨울을 보냈다.

 

도연명에게 출생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 중 하나일 뿐이다. 도연명에게는 만인이 평등할 뿐 아니라 만물이 동등하다. 그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어서 즐겁고 인간 중에서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여서 즐겁고, 장수해서 즐겁다는 도교의 영계기(榮啟期)가 말한 군자삼락(君子三樂)* 따위의 이야기와 무관하다.

 

* 영계기(榮啟期)의 군자삼락 : 영계기는열자(列子)』 「천서天瑞에 등장하는 춘추(春秋)시대의 은사(隱士), 전설에 따르면 일찍이 성()의 들판에서 공자(孔子)와 대화를 하는 중에 스스로 세 가지 즐거움을 꼽기를, “첫 번째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고, 두 번째 즐거움은 남자가 된 것이고, 세 번째 즐거움은 90세까지 장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용자

 

그러나 가난은 도연명의 삶 자체였다. 유가나 도가는 도를 중시하고 가난과 영달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도연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자나 장자와 달리 도연명은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했기에 그의 시는 가난을 즐겨 다룬다. 하지만 주목할 점이 있다. 도연명에게 가난은 자신의 길을 지키기 위한 소위 조건일 뿐, 가난 그 자체에 대한 불만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의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었고,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가난이었다.

 

여기서 도연명이 피로를 잊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고 또 이웃과 연대를 맺게 하는 개체로 이 등장한다. 따라서 도연명을 단순히 술을 좋아한 음주 시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음주는 그의 자발적 가난이 빚은 고통에 대한 치유이자, 이웃과의 소통을 위한 윤활제였고, 동시에 자연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치유제였다. 즉 자유와 자치와 자연의 벗이었다. 그래서 술은 그가 전원에 들어가고부터 그에게 소중한 것이 된다.

 

농사는 즐거웠다

 

즐거운 마음으로 계곡물을 길었고 나뭇짐 지고 가며 노래 불렀다. 어두운 사립문 나서서 새벽부터 한밤까지 일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들에 나가 부지런히 일했다. 김을 매고, 흙을 북돋우며 길러서 거두어들였다.

 

도연명은 농사꾼이었다. 그를 자연시인이나 전원시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가 농사꾼 시인이라는 점을 약화하려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불만이다. 도연명 이전에도 자연이나 전원을 노래하는 시인들은 있었다. 그러나 농사꾼으로서 시를 쓴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그의 시 125수 중 농사에 관해 쓴 농시25수로 5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많다. 그처럼 많은 농사 시를 쓴 사람도 없었다.

유가에서는 농사꾼을 멸시하고 사대부는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농사꾼 시인이 유가 쪽에서는 아예 나올 수 없었다. 공자는 농사를 배우려는 제자 번지(樊遲)를 비판했고** 맹자는 임금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농가의 허행(虛行)을 비판했다.*** 그러나 도연명은 번지를 존경하여 시에서도 언급했다. 허행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없지만, 뒤에서 보듯이 이는 당시 맹자에서 허행이 비판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 공자는 나는 어렸을 때 지위가 비천했기 때문에 아랫사람의 일을 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논어』 「자한子罕).

제자 번지가 곡식 농사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채소 농사짓는 법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노련한 채소 재배자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소인배로구나, 번수(樊須, 번지의 본명, 는 자)는! 마음에 큰 뜻이 없고 향상심이 없다니.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불경할 수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윗사람이 신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진심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이와 같으니 사방의 백성들이 포대기에 자식을 업고 올 것인데 농사짓는 법을 어디에 쓰겠느냐?”(논어』 「자로) -인용자

 

*** 맹자』 「등문공(滕文公) 에서는 許行(허행)’신농(神農)의 설을 실천하는 인물로 소개되며, 등문공과의 대화 속에서 허행의 말이 인용된다.

허행은 춘추시대(기원전 770~403)의 등()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수십 인의 문인(門人)에게 농업 생산에 의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주장하였다. 그의 명성에 힘입어 있는 곳으로 곧 송()에서 진상(陳相)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하는 수십 인이 달려왔다.

허행의 무리는 농업의 신(農業神)이자 상고(上古)의 전설적인 제왕인 신농(神農)의 가르침을 기치로 삼아,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것을 설파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지주의 착취나 상인(商人)의 농민에 대한 이윤추구를 배척하고 저항하였다.

허행의 무리는 농업 생산에 필요한 공구를 생산하는 수공업자 역시 노동에 종사하는 자라 하여 그 존재 의의를 인정하였다. 인간은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노동에 의하여 자신의 생활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결과에 의한 잉여(剩餘)는 각자 노동자의 소유에 귀속시킨다. 이렇게 해야만 천하가 고루 공평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맹자』 「등문공 상에 인용된 허행의 주장 중에는 모든 재화는 크기나 무게가 같으면 가격도 같도록 가격을 통제해야 하며 이로써 허황된 사치품과 이를 통해 상인들이 얻는 사기나 폭리는 사라지고 기본적인 기능만 갖고 있는 질박한 재화만이 남아 백성들이 평안해질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인용자

 

유가와 달리 도가에서는 농사를 권장했다. ()

도연명은 어려서부터 유가와 도가 등을 공부하면서 예기(禮記)의 대동(大同)이나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에 대해 알았고, 또한 당대의 선배 유학자인 완적(阮籍, 210~263) 등의 책도 읽으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그는 유가 지식인으로 출세할 필요가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했으므로 늦은 나이에서나마 벼슬길에 나섰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이 추구한 이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방황한 끝에 결국 벼슬길을 포기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사회인 도화원을 건설하고자 시골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곳을 이상사회인 도화원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것이 그의 삶이고 그의 시였다.

 

독서와 거문고 덕에 즐거웠다

 

즐겁게 책을 읽고 거문고 타며 흐뭇했다. 겨울에는 따스한 햇볕 쬐고 여름에는 냇물에 씻었다. 바빠 쉴 틈이 없었으나 마음은 늘 한가로웠고, 천명을 즐기며 분수에 맡겨 어언 일생을 살았다.

 

도연명은 자기 삶을 가난으로 축약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난은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가난과 부는 물질의 문제이지만, 즐거움과 괴로움은 마음의 문제다. 따라서 가난이 반드시 괴롭고, 부가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지만, 항상 가난하다. 그러나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서 즐겁다. 세상과 달리 자기의 길을 간다면 가난은 고고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반속(反俗)의 시인이다.

 

나는 세상과 다르다

 

이 한평생 모두 아끼는데, 이룬 바 없을까 염려하여 하루를 탐하고 시간을 아쉬워한다. 살아서 세상의 보배가 되려 하고 죽어서 길이 기억되길 바란다. , 나는 홀로 내 길을 걸어 세상과 생각이 달랐다. 사랑받아도 영예롭지 않았고 진흙이 묻어도 검게 물들지 않았다. 가난한 오두막에 고고했고 술 마시고 시를 읊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이루고 죽어서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만 도연명은 그런 세상과 달리 살았다. 그 역시 젊었을 적에는 성공과 명성을 바랐지만, 귀거래사이후에는 그런 욕망을 깨끗이 포기했다. ‘유교인으로서의 야망을 포기한 것이다. 유교인에게는 살아생전에 벼슬을 하는 것이 나라에 대한 충성이자 부모에 대한 효도였다. 그러나 도연명은 젊은 나이에도 그런 출세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했다. 그리고 벼슬을 완전히 접고 시골에 들어간 뒤로는 세속적 욕망을 완전히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탈속(脫俗), 초속(超俗)의 시인이라 할 만하다. 후기 시에서도 명예에 대한 갈망을 그가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런 점이야말로 도연명을 더욱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

 

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

 

시운에 밝고 운명을 안다면 누가 미련을 갖겠는가? 나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 더는 아무런 여한이 없다. 백 살 가깝도록 은거 생활을 동경하였는데 살 만큼 살고 늙어서 죽으니 바랄 것이 무엇 있겠는가? 추위와 더위는 빠르게 지나가고 죽은 이는 남은 이들과 다른 길에 섰다. 친척들은 새벽에 오고 친구들은 한밤에 달려와 나를 들판 가운데 묻어 넋을 위로한다. 어둠 속에서 나는 가고 무덤 입구에는 찬 바람이 분다. 송나라 환퇴의 사치는 부끄럽고 한나라 양왕손의 검소는 가소롭다.

 

환퇴(桓魋)는 춘추시대에 송나라 사람으로 그가 죽으면 쓸 석곽을 3년 이상 만드는 것을 보고 공자가 이렇게 사치할 바에야 속히 썩는 것이 낫다라고 말해서 공자를 죽이려고 했는데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가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양왕손(楊王孫)은 전한 중기의 황로학(黃老學)의 대가로 죽으면 알몸으로만 제사 지내라고 유언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묻혔다. 도연명은 그 어느 경우나 극단적인 것으로 보고, 봉분을 만들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를 빨리 잊어달라는 뜻이다.

 

죽은 나를 잊으라

 

죽어 사라졌으니 허무하고 멀리 떠났으니 탄식한다. 내 무덤엔 봉분도 나무도 없이 해와 달만 지나가게 하고 살아서도 명예 찾지 않았거늘 죽은 뒤엔들 찬양을 중시할까. 인생이 참으로 고달팠거늘 사후세계는 또 어쩔는지. ! 슬프다!

 

도연명은 이 글을 42710월에 쓰고 두 달 뒤인 12월에 학질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약을 쓰지도 않았고 귀신에게 빌지도 않았으니 스스로 치료를 포기한 셈이다. 365년에 태어나 62년을 살다가 죽었다. 널리 부고도 하지 않았고, 조의금도 받지 않았으며, 풍수에 따라 장지를 고르지도 않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당시 중국에서는 매장이 일반적이고 봉분 주위로는 나무를 심었는데, 도연명은 그 모두를 거부한다. 그리고 찬양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농사꾼다운 마지막이었다. 나도 그렇게 죽기를 바란다.

 

 

2장 도연명의 시대, 디스토피아

 

3장 주경야독으로 보낸 성장기(0~27)

 

오류선생전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은 도연명이 자신의 아호을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하면서 자신의 생활관과 인생관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글이다.

 

오류선생전오류란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뜻하는데 그것들은 도연명의 집 앞에 있었다.

 

선생이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그의 성()과 자()도 모른다. 집 옆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기에 그것으로써 호를 삼았다. 그윽하고 조용하며 말이 적었고 명예나 실리를 바라지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매번 뜻에 맞는 글이 있으면, 즐거워하여 끼니도 잊었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자주 마실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이와 같은 처지를 알고 때때로 술자리를 마련하여 그를 불렀다. 마시는 데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다 마셔버려 반드시 취하고야 말았다. 취하고 난 후에는 물러가는데, 가고 머무름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누추한 집은 쓸쓸하기만 하고 바람과 햇빛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다. 짧은 베옷을 기워 입고, 밥그릇이 자주 비어도 마음은 편했다. 항상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면서 자못 자기 뜻을 나타내려 하였다. 이득과 손실에 대한 생각을 잊고서, 이러한 상태로 자신의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그래서 주인공을 칭찬해 쓴다. ()나라의 검루(黔婁)****에 대해 말하기를 빈천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부귀에 급급해야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말을 잘 새겨보면 검루는 오류선생과 같은 무리이다. 술을 흠뻑 마시고 시를 지으며 그 뜻을 즐기니, 무회씨(無懷氏) 시대의 사람인가? 갈천씨(葛天氏) 시대*****의 사람인가?

 

****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에 검루(黔婁)라는 은사(隱士)가 살았다. 학식이 높고 청렴결백했다. ()가 아니면 구()하지 않았고 인()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그가 말을 하면 경()이 됐고 행동에 옮기면 법도(法度)가 됐다. 온 나라 백성이 존경했고 제왕인 임금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가 죽었다.

당시 최고 석학이었던 증자(曾子)가 문인들과 함께 조문을 갔다. 그의 아내가 증자 일행을 맞이했다. 빈소에 올라가 시신을 보니까 짚으로 짠 멍석으로 자리를 펴고 기왓장으로 베개를 했다. 그런데 시신을 덮은 포()가 짧아 시신을 다 가리지 못했다. 머리까지 덮으면 발이 나오고 발을 덮으면 머리를 가릴 수가 없다.

증자는 그것이 딱해 부인에게 말했다. “바르게 덮지 말고 엇비슷하게 사선으로 덮으면 다 가려지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부인은 사선으로 덮어서 넉넉한 것이 바르게 덮어 부족한 것만 못합니다. 선생은 생전에도 바르지 않은 것은 행하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그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선생의 뜻이 아닙니다라며 거절했다.

증자는 더 이상 대꾸를 못 했다. ()을 끝내고 부인에게 다시 물었다. “시호(諡號)는 무엇으로 지어드릴까요?” 아마 증자가 시호를 지어드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부인은 망설임 없이 편안할 강()자로 시호를 삼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고인의 삶이 편안했다는 뜻이다.

증자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선생께서는 생전에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했고 낡고 헤어진 옷이 몸을 다 가리지 못했습니다. 죽어서도 염()을 다하지 못했고 빈소에도 술 한 잔 그리고 고기 한 점이 없습니다. 살아생전에도 좋은 일이 없었고 죽어서도 결코 영광되지 못한데 무슨 즐거움이 있었다고 강()을 시호로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부인은 정색을 하며 지난날 선생께서는 임금님이 재상을 삼으시겠다고 해도 분수에 맞지 않는다며 한마디로 거절하셨고 곡식 30(: 300가마)을 하사했어도 대가 없이 받는 것은 뇌물이라며 사양하셨습니다. 선생께서는 평생 빈천을 슬퍼하거나 근심하지 않았으며(불척척어빈천: 不戚戚於貧賤), 부귀를 탐내거나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불흔흔어부귀: 不忻忻於富貴). ()을 구하여 인()을 얻었고 의()를 구하여 의()를 얻으셨으니 이만하면 편안한 삶이 아닙니까? 그러니 시호를 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증자는 또다시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 진실로 그 사람에 그 부인이로구나!(유사인야이유사부: 唯斯人也而有斯婦)”라고 감탄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유향(劉向)이 쓴 열녀전2 현명전가운데 노검루처(魯黔婁妻)’ 편에 실려 있다. -출처 https://www.jjan.kr/article/20250813580180-인용자

 

***** ‘무회씨갈천씨는 모두 전설 속 중국 상고의 제왕. 무회씨는 그 백성이 잘 먹고 안락한 삶을 즐겼으며, 닭 울음과 개 짖는 소리가 번갈아 들리고 백성이 노사(老死)에 이르러서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함. 도교ㆍ도학 문헌에서는 부귀를 부채하지 않는(가난ㆍ천한 상태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의 성품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쓰인다. 갈천씨는 이상적 정치를 펼쳐 태평했다고 하여 성군(聖君)이라 한다. -인용자

 

 

4장 벼슬과 농사 사이에서 방황하다 (28~40)

 

내 힘찬 젊은 날

 

도연명은 젊은 날을 회상하는 시를 많이 썼다.

 

잡시(雜詩)

 

내 젊었을 때를 생각하니

즐거운 일이 없어도 절로 기뻤네.

거칠 것 없는 포부는 사해를 달리고

날개를 펼쳐 멀리 날아가길 바랐네.

무정한 세월은 흘러만 가더니

웅비하려던 마음 점점 사라져 갔네.

기쁨을 만나도 다시 즐겁지 않고

모든 일에 걱정만 늘어가네.

기력은 점차 떨어져 가고

날마다 이전만 못 함을 알겠네.

고단한 항로는 조금도 멈추지 않아

나를 끌어들여 쉴 수가 없네.

앞길이 얼마나 남았는가?

정박할 곳 어디인지 모르겠네.

예사람 촌음(寸陰)을 아껴 써라 했는데

그 생각에 화들짝 두려움이 앞서네.

 

최초의 농시

 

도연명이 쓴 최초의 농시는 40338세에 지은 계묘년 촌집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원제는 계묘세시춘회고전사(癸卯歲始春懷古田舍).

 

예전에 남쪽 밭에 대해 듣긴 했어도,

그때는 농사를 지어보지 못했네.

가난하기로는 안회와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봄이 오니 어찌 밭갈이를 피할 수 있으랴?

이른 아침 수레에 짐을 싣고

길 떠나니 마음은 벌써 저 멀리 향하네.

새들은 지저귀며 새봄을 기뻐하고

시원한 바람은 넉넉한 선심을 베푸네.

황폐한 땅은 찬 풀에 뒤덮여 있고

밭은 얼어 인적이 드무네.

그래서 지팡이 꽂고 김매던 노인네

유유자적하여 다시는 세속에 돌아가지 않았네.

도리를 따짐은 박식한 이들에게 부끄럽지만

절조를 보전함이 어찌 천박하다 하겠는가?

 

공자께서 남기신 가르침에

도를 걱정하되 가난은 걱정 마라셨네.

우러러보아도 아득하고 도달하기 어려워

생각 바꿔 길이 농사에 힘써볼까 하네.

쟁기 잡고 때맞춰 즐겁게 농사짓고

웃음 띤 얼굴로 농부들을 격려하네.

평탄한 넓은 밭에는 멀리서 바람 불어오고

좋은 싹들도 새로운 생기 품고 있네.

올해 수확은 아직 알 수 없으나

눈앞의 농사일에 즐거움이 한량없네.

밭 갈고 씨 뿌리며 때때로 쉬어도

나루터 묻는 나그네도 없네.

해가 지면 함께 돌아와

술병 들고 이웃을 위로하네.

사립문 닫으며 길게 읊조리니

그럭저럭 농부가 된 것 같네.

 

 

5장 농사꾼 아나키스트 출발(41~43)

6장 남천의 농사꾼 아나키스트 시인(43세 이후)

7장 아나키스트 도연명, 권력을 거부하다(56세 이후)

 

8장 도화원, 농사꾼 아나키스트의 유토피아

 

도화원시

 

()나라 폭정이 세상을 어지럽혀

현자들은 세상에서 몸을 숨겼다.

은둔자들도 상산으로 갔지만

그들 역시 이곳으로 피해 왔더라.

은신해 갔던 발자국은 묻혀 사라지고

도화원으로 오던 길도 황폐해버렸다.

서로 도와 농사짓고

해가 지면 편하게 쉰다.

뽕과 대나무가 무성하고

콩과 기장을 철 따라 가꾼다.

봄엔 누에가 긴 실을 뽑아내고

가을엔 오곡이 익어도 세금이 없다.

길은 황폐해 오가기 어렵고

닭과 새가 서로 우짓는다.

제사도 옛 법 그대로고

옷도 새로 지은 것이 없다.

어린이들은 멋대로 길에서 노래하고

백발노인들은 즐겁게 서로 찾는다.

풀 자라니 온화한 봄철임을 알고

나무 시들면 바람이 찬 겨울임을 안다.

비록 달력도 책도 없지만

사계절 변천으로 일 년을 알 수 있다.

기쁜 낯으로 마냥 즐겁게 살고

애써서 꾀를 부리거나 재간을 피우지도 않는다.

흔적 없이 가려진 지 오백 년 만에

홀연히 신비의 세계가 나타났으나,

순박한 도원경과 야박한 속세가 맞지 않아

이내 다시 신비 속으로 깊이 숨었네.

속세의 노는 사람에게 묻노니

먼지와 소음 없는 신비경을 아는가?

바라건대 사뿐히 바람을 타고

높이 올라 나의 이상향을 찾으려 한다.

 

 

맺음말

 

내가 굳이 이 책을 쓰는 이유는, 통설과 달리 도연명을 농사꾼 아나키스트이자 유토피안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란 모든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이고 유토피안이란 아직 현실이 없는 이상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다. 도연명은 불과 3년도 안 되는 벼슬 생활을 과감히 버리고, 거의 평생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임금도 귀족도 없는, 누구나 농사를 지으며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 그는, 내가 보기에 아나키 유토피안의 전형이다. 지금까지 국내외 어디에서도 이렇게 읽어낸 경우가 없었기에, 나는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농사꾼들에게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박홍규, 내 친구 도연명 농사꾼 아나키스트 시인, 틈새의시간,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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