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이옥
- [보도자료]
- 2026-02-07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이옥
일탈과 실험
산문(散文)이란 ‘흩어 놓은 글’이다. 글자 수나 음악적 효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돈되지 않고 흩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형식 요건을 규범화하지 않는 것은 생각과 감정을 정해진 틀에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여기, 한 산문 작가가 있다. 산문 문체의 모든 형식들을 이지러뜨리고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을 실험한 사람이다. 과거에 대비해서 연습하던 ‘부(賦)’도 산문의 문체로 훌륭하게 부활시켰으며 일반 민중들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지(장첩狀牒)도 인간관계의 실상을 반영하는 허구적 요소를 지닌 산문으로 멋지게 사용하였다. 불경의 어조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인생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가 곧 이옥(李鈺, 1760~1812)이다.
이옥, 그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풍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같은 시대의 문인이자 친구였던 김려(金鑢)가 말하였듯이, 그의 시문에서는 기이한 생각과 감정이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토하듯, 샘물구멍에서 물이 용솟음치듯 흘러나온다.
이옥은 천부적으로 글을 잘 지었다. 글을 신속하게 지었으며, 뜸 들여 구상하지도 않았고 다 지은 뒤 고치는 법이 없는데도 장편이든 단편이든 글자마다 권점(圈點)을 쳐야 할 판이다.
그는 또 방언과 속어를 글 속에 사용하였다. 남들은 그것을 두고 글의 병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방언과 속어를 사용한 것을 생경하고 껄끄러운 글쓰기를 배격하고 자연스러운 행문(行文)을 추구한 결과다. 그는 글쓰기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실험하여, 규범적 세계로부터 벗어나고픈 지향의식을 담아내었다.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면서 디테일의 묘사와 섬세한 감정의 표출에 주력한 그는, “나는 지금 세상 사람이다. 나의 글을 한다”라고 외쳤다. 옛글의 문체를 따른다면 형식주의에 빠지거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옥이란 인물
이옥의 자(子)는 기상(其相)이다. 호(號)는 문무자(文無子)ㆍ매사(梅史)ㆍ매암(梅庵)ㆍ경금자(絅錦子)ㆍ화석자(花石子)ㆍ청화외사(靑華外史)ㆍ화서외사(花溆外史)ㆍ매화외사(梅花外史)ㆍ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등을 사용하였다. 본관은 전주다. 조부 이동윤(李東胤)은 서울에서 살았으며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를 지냈다. 부친 이상오(李常五, 자는 사항士恒)는 1754년(영조 30)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옥의 본가는 경기도 남양(南陽) 매화산(梅花山) 아래에 있었다. 15세에 최종(崔宗)의 딸과 결혼하였고, 뒷날 아들 우태(友泰)를 낳았다.
이옥의 산문
이옥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 세상을 엿보듯, 미세한 사항에 조정을 맞추고 그것을 묘사해 내는 데 정신을 쏟기 일쑤였다.
이옥은 농업이 민생의 근본이라는 견해를 견지하여 농법, 전세, 농정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이옥은 당시 상업이 형성하고 있는 현상의 주목하고 그 역동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함께 드러내었다.
이옥은 지방에서의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지방의 가치를 재발견하였다. 특히 지역적 차이와 공동체의 관습에 따라 방언이 생긴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옥은 여성의 삶에 깊이 주목하였다. ≪봉성문여(鳳城文餘)≫에서는 성주(星州)의 양녀 애금이 관청에 올린 소장을 다듬어 소개하였고(애금공상愛琴供狀), 또 한 여자가 아홉 남편을 모두 사별하고 한 자리에 나란히 묻고 자신도 같은 자리에 묻혀 십총을 이룬 이야기를 적었다(구부총九夫塚). 그리고 야합을 하다가 부모에게 들켜 기적(妓籍)에 이름이 오른 필영(必英)이 그 부당함을 하소한 소장도 고쳐서 소개하였다(필영상사必英狀辭).
사계층의 문인이었던 이옥은 현실의 매개적 참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조선 사회에서 널리 사용하던 한자 어휘와 새로운 조어를 과감하게 채용하여 표현의 폭을 확대하였다.
이옥, 그는 봉건사회의 질곡에서 벗어나 참다운 개성을 글 속에 담아내려고 하였던 실험적 작가였던 것이다.
제1부 시대의 명인, 기인
가객 송실솔 歌者宋蟋蟀傳(가자송실솔전)
송실솔은 한양에 사는 가객(歌客, 소리꾼)이다. 노래를 잘하였는데, 특히 귀뚜라미 노래를 잘 불렀다. 그래서 이름을 실솔(귀뚜라미)이라 했다.
실솔은 젊어서부터 노래하는 것을 배웠다. 자기 나름의 소리를 얻은 뒤에는,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가 으르릉 쿵쾅 내리찧는 곳에 가서 날마다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노래 부른 지 한 해가 되자, 오직 자기가 부르는 노랫소리만 들릴 뿐, 폭포 쏟아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다시 북악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높고 확 트인 곳을 의지하여 신들린 듯 노래하였다. 처음에는 째지는 소리가 나서 고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를 한 해 남짓 하자, 회오리바람이라 해도 그 노랫소리를 흩어지게 하지 못했다.
그 뒤로 실솔이 방안에서 노래하면 그 소리가 대들보에 울려나고, 마루에서 노래하면 그 소리가 대문에까지 들렸다. 배에서 노래하면 소리가 돛대 위로 뻗었고, 골짜기 시내에서 노래하면 소리가 구름 사이에 울려 퍼졌다. 노랫소리가 세차기는 마치 북과 징 소리 같고, 깨끗하기는 옥구슬 소리 같으며, 한들거리기는 아지랑이의 가벼움 같았다. 소리가 일시 머물 때에는 하늘에 구름이 비낀 것 같고, 조잘조잘할 때는 꾀꼬리가 제철을 만나 우는 것 같으며, 떨칠 때는 용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거문고에도 잘 맞고 젓대(대금)에도 잘 맞고 퉁소에도 잘 맞고 쟁(箏)에도 잘 맞을 만큼 그 묘함이 극치에 이르게 되었다.
실솔은 그제야 옷깃을 여미고 갓을 바로 쓰고는 뭇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하략)
무당을 혼내준 최생원 崔生員傳(최생원전)
최생원이라는 선비는 본시부터 귀신을 업신여겼다. 그는 마을 백성 가운데 귀신을 섬기는 푸닥거리를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가서 휘저어 버려 그만두게 하고야 말았다.
언젠가 그가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길가 수풀에 묵은 사당 하나가 있었고, 거기서 푸닥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갓을 쓰고 비단옷을 차려입은 무당이 막, 왼손으로는 나무숟갈(비批)을 꽂고 오른손으로는 부채를 흔들고 있고 시골 부로(父老)들은 음식을 올리고 허리를 굽혀서 치성드리고 있었다. 그 꼴을 목격한 최생원은 크게 노하였다. 말몰이꾼을 호통하여 말을 내몰게 해서 앞으로 다가가서는, 채찍으로 무당을 휘몰아 쫓아버렸다. 또 종이로 만든 칼을 비틀어서 꺾어 버리고, 상탁(床卓, 제상과 향탁)을 발로 걷어차서 땅 위에 거꾸러뜨리며,
“하찮은 귀신 놈이 어찌 감히 백성을 현혹시키는 게야!”
하고 욕설을 해대었다. 그런 뒤 몇 리를 더 말을 타고 갔는데, 노여움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별안간 그가 탔던 말이 땅에 쓰러져 죽었다. 말몰이꾼은
“아이구 아이고, 전 내버려두세요! 이 신이 본디 영험하시거늘 신의 노여움을 사서 말이 지궐(地厥) 맞아 죽었으니, 이걸 어쩐대요?”
라고 하였다. ‘지궐’이란 그 고을 사람들이 신벌(神罰)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최생원은,
“이런 잡귀신 놈!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하고, 분한 기운을 이기지 못해서 미칠 듯하였다.
그는 다시 돌아가 사당으로 들어가서는, 지푸라기를 긁어모아 사당의 지붕에 불을 놓았다. 그러자 쟁반만큼 커다란 이상한 검은 기운이 일어나더니, 사당을 나와서 산 고개를 넘어가 사라졌다.
그 뒤 최생원도 늙어가면서 지기(志氣)가 점차 쇠하여, 다시금 귀신에 대해서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산길을 걷다가, 해가 저물었기에 한 촌가로 들어가 묵어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주인은 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 저녁에는 신에게 기도드릴 일이 있기에, 예법으로 보건대 손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
최생원은 껄껄 웃었다.
“내 어찌 귀신에게 제사 지낸다는 이유 때문에 묵어가지 못할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한사코 묵어가겠다고 하여 마침내 그 집에 묻게 되었다. 하지만 그 주인이 귀신에게 푸닥거리하는 것은 말리지 않았다. 그는 또 그곳이 바로 자기가 옛날에 사당을 불태운 시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하였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어 누워서 들은 즉, 귀신이 무당에게 내려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귀신 들린 무당은 그 주인을 뜰 밑에 꿇어앉히고 다음과 같이 정녕히 타일렀다.
“넌 내가 어떤 신이라고 생각하느냐? 네 재물은 풍족하냐? 장만한 물건이 정결하냐? 넌, 날 위해 수배상(隨陪床)을 차리되, 저 허주(墟主)나 군웅(軍雄)이나 다른 잡신들에게 하듯이 해서는 안 될 것이야. 또 내게 상을 차리되, 저 수배상과 같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최생원의 상은 따로 차려 드렸느냐? 최생원의 높으신 정도야말로 내가 견줄 바 못 되니, 그 상은 내 상의 제물보다 열 배는 더 높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최생원은 반드시 너를 죽일 게야.”
주인은 ‘예이’ 하고 답하였다. 이는 대개 무당의 ‘안반고사(安盤告辭, 음식을 차릴 때 주인에게 다짐받는 고사)’였다. ‘수배’는 신의 종자이며, ‘허주’와 ‘군웅’은 무당들이 숭배하는 신들이다.
최생원은 껄껄 웃었다.
“귀신 중에도 나와 성이 같은 자가 있나?”
얼마 안 되어 주인이 그가 묵은 방 앞을 종종걸음으로 지나쳤다.
최생원은 그를 불러서 영문을 물었다. 주인이 말하였다.
“우리 고을에는 옛날에 신당(神堂, 신령을 모아 놓은 당집)이 저 언덕 밖에 있어서 해마다 가을이면 마을 사람들이 곡식을 추렴해서 한바탕 치성을 드렸는데, 그렇게 하면 온 마을에 병이 없으려니와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해에 어떤 길손이 신령님을 업신여긴 탓으로 말이 신벌(神罰)을 받아 죽었지요. 그러자 그 길손은 패려궂게도 신당을 불태웠고, 그래서 사당에 살던 신은 자리를 옮겨 마을의 집에서 제삿밥을 먹게 되었지요. 마을 집에는 해마다 한 번씩 제사해야 신이 노하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사당의 신이 이곳으로 옮겨온 뒤로는 늘 별도로 한 상을 차리게 하는데 그걸 ‘최생원공(崔生員供)’이라 하지요. 아마 옛날 사당을 불태웠던 그 길손의 영혼을 위함인 듯합니다.”
최생원은 옛일을 돌이켜 생각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마침내 웃으며 말하였다.
“그 최생원이 곧 나요. 내가 바로 사당을 태운 그 길손이오. 빨리 최생원 상을 들이시게. 내 좀 배불리 먹어 보리다.”
주인은 기이하게 여겨서, 안으로 들어가 무당에게 말하였다.
“바깥채에 손님 한 분이 계신데, 자기가 곧 최생원이라 하더이다.”
무당은 별안간 꼬꾸라졌다. 한참 뒤에 깨어났으나, 신은 벌써 떠나가 버리고만 뒤였다. 무당은 밤새도록 신이 내려오게 청하였으나, 신은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제2부 혀가 달린 글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蜘蛛賦(지주부)
이 선생이 저녁 서늘한 틈을 타서 뜰에 나가 거닐다가, 한 마리 거미가 낮은 처마 앞에 거미줄을 날리고, 해바라기 가지에 망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거미는 거미줄을 가로로 치고 세로로 치고 수직으로 펴고 수평으로 펴는데, 그 너비는 한 자쯤 되고 그 형식은 컴퍼스에 맞았으며, 성글지 않고 조밀하여 실로 교묘하고도 기이하였다. 이 선생은 그것을 보고 거미에게 기심(欺心, 남의 것을 탐내는 욕심)이 있다고 여겨 지팡이를 쳐들어서 그 거미줄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전부 걷어내어 없애고는 내려치려고 하는데, 거미줄 위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듯하였다.
“나는 내 줄을 짜서 내 배를 채우려고 하오.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내게 해독을 끼치는 게요.”
이 선생이 노하여 말하였다.
“기계를 설치하여 생명을 해치는 것은 벌레들의 적이다! 나는 너를 제거하여 다른 벌레에게 덕을 베풀겠다.”
그러자 그자는 다시 껄껄 웃으면서 말하였다.
“아아! 어부가 그물을 설치하여 바닷물고기가 걸려드는 것을 두고 어부가 포악한 짓을 한다고 하겠소?
우인(虞人, 수렵을 담당하는 동산지기)이 그물에 들짐승이 걸려 결국 부엌에 요리로 오르게 된다면, 우인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겠소?
사사(士師, 법무관)가 내건 법령에 악독한 자가 저촉되어 감옥이나 유배지에 갇히게 된다면 그걸 두고 사사의 잘못이라고 하겠소?
만일 선생 말대로라면 선생 같은 분들이 어찌 복희(伏羲, 잔설 속의 제왕, 태호太昊를 말한다. 처음으로 8괘를 그렸다고 하고, 백성들에게 고기 잡고 목축하는 법을 가리켰다고 한다. ‘포희包犧’ㆍ‘복희宓犧’라고도 적는다)가 그물을 칠 때 간하여 말리지 않았고, 백익(伯益, 순舜임금 때 동이東夷 부락의 수장)이 산악을 불태울 때 막지 않았으며, 고요(皐陶, 순임금의 신하로 형별을 관장하였다)가 죄를 논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꾸짖지 않았단 말이오? 그것과 이것이 무어 다르단 말이오?
더구나 선생은 내 그물에 걸려든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아오? 나비는 방탕한 자라서 분단장을 해서 세상을 속이고 번화한 것을 좋아하여 쫓으며 흰 꽃 붉은 꽃만 편애하오. 그렇기에 내 그물에 걸려드는 것이오.
파리는 진실로 소인배라 깨끗한 옥도 그놈 똥이 묻어 참소를 입었고(승분점옥蠅糞點玉, ≪비아埤雅≫에 보인 진자앙陳子昂의 시 <연호초진금소宴胡楚眞禁所>에서 ”쇠파리가 오점을 하나 찍으매, 흰 옥구슬이 원한을 맺도다“라고 하였다), 술과 고기에 맛을 들여 목숨이 중요한 것을 잊으며(반고班固의 ≪난장론難莊論≫), 이익을 좋아하여 싫증을 내지 않소. 이 때문에 내 그물에 걸려드는 것이오.
매미는 자못 청렴 정직하여 문학 하는 선비 같지만(우세남虞世南의 시 <선禪>, 구양수歐陽修의 <명선부鳴蟬賦>), 제 울음이 좋다고 스스로 자랑하여 시끄럽게 울어대오. 그 때문에 내 그물에 걸려드는 게요.
벌은 실로 마음이 삐뚤어진 놈이라, 제 몸에 꿀과 칼을 지니고는 망령되게도 아문(衙門)에 간다고 하면서 부질없이 봄꽃을 탐내오. 이 때문에 내 그물에 걸려든다오.
모기는 가장 엉큼한 놈으로 성질이 도철(饕餮) 같아 낮에는 숨고 밤에는 나타나서(≪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 사람의 고혈을 빨고 다니오. 그것 때문에 내 그물에 걸려들어요.
잠자리는 품행이 방정맞아 귀공자 마냥 촐랑대어(≪시경詩經≫ 소아小雅 <대동大東>), 제자리에 눌러앉아 있지 않고 회오리바람같이 홀연 이리 날고 저리 날죠. 그 때문에 내 그물에 걸려든다오.
그밖에 부나방은 재앙을 즐기고, 초벌레는 일을 좋아하며(≪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 단조(丹鳥, 반딧불이)는 활활 타오르는 듯 과장하고, 천우(天牛, 하늘소)는 감히 하늘이란 이름을 몰래 훔쳤지요. 선명한 빛깔의 치마 같은 하루살이(≪시경詩經≫ 조풍曹風 <부유蜉蝣>)와 수레바퀴에 맞서는 사마귀의 무리들(≪장자≫에 있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고사)은 허물을 스스로 만들어 흉액을 피할 수 없기에, 그물에 몸이 걸려 간과 뇌가 땅에 짓밟히게 된다오.
아! 주나라 성왕ㆍ강왕의 화평 시절이 아니므로 형벌을 쓰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은 신선이나 부처가 아니므로 공밥을 먹을 수도 없는 것, 저들이 그물에 걸린 것은 저들의 잘못이니, 내가 그물 친 것이 어찌 나의 잘못이란 말이오? 그렇거늘 선생은 저들에게는 사랑을 베풀면서 나에게만은 화를 내며, 나를 훼방하면서 도리어 저들을 보호한단 말이오?
오호라! 기린은 붙잡을 수 없고 봉황은 유인할 수 없듯이, 군자는 도리를 알기에, 오랏줄에 묶여 감옥에 있는 것이 재앙이 될 수 없소. 아무쪼록 이것을 잘 보시고 삼갈 것이며 힘쓸지어다! 스스로의 이름을 팔지 말고 스스로 재주를 함부로 자랑하지 말며, 이익을 추구하다가 재앙을 부르지 말고 재물 때문에 죽지 마시오. 스스로 똑똑한 채 망령되이 굴지 말고, 남을 원망하거나 시기하지 마시오. 땅을 잘 가려서 디딜 만한 곳인지를 알아본 뒤 발을 내디디고, 때에 맞추어 갈 때 가고 올 때 오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는 훨씬 큰 거미가 있으니, 그 그물은 내가 쳐 놓은 경계 정도가 아니고 훨씬 크다오.”
이 선생이 그 말을 듣고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세 번이나 자빠질 정도로 허겁지겁 내달려 문간에 이르러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는, 바닥을 굽어보면서 비로소 한숨을 쉬었다.
거미는 다시 나와서 종전처럼 그물을 치기 시작했다.
제3부 미적 취향과 세계의 인식
송광사 寺觀(사관)
전주 동쪽 종남산 아래, 여기에 송광사라는 절이 있다. 외문(일주문一拄門)의 기둥은 채색을 하였으되 대패질은 하지 않았다. 제2문(천왕문天王門)은 금강이 둘, 옥녀가 둘 지키고 있었다. 제3문(해탈문解脫門)은 게제(揭帝, 불법을 수호하는 사나운 신) 넷이 좌우로 나뉘어 서 있는데, 모두 쇠갑옷ㆍ쇠투구에, 쇠도끼ㆍ보피(寶鈹, 칼)를 들고 있다.
(중략)
나한전을 보니 나한은 오백 이상이다. 눈이 물고기같이 흐린 것, 눈썹을 드리운 것, 봉새처럼 둘러보는 것, 눈 감고 자는 것, 눈두덩이 불거진 것, 눈동자가 튀어나온 것, 부릅뜬 것, 흘겨보는 것, 곁눈질하며 웃는 것, 닭처럼 성내며 보는 것, 세모난 것이 있다. 눈썹은 칼처럼 날카로운 것, 나비의 촉각(더듬이)처럼 갸름하고 아름답게 생긴 것, 굽은 것, 긴 것, 몽당비 같은 것이 있다. 코는 사자처럼 들린 것, 양처럼 생긴 것, 매 부리처럼 굽은 것, 주부코인 것, 밋밋한 것, 전갈 같은 것, 대롱을 잘라놓은 듯한 것이 있다. 입은 입술이 말려진 것, 앵두 끝처럼 생긴 것, 말 주둥이 같은 것, 까마귀 부리 같은 것, 호랑이 입처럼 위아래 입술을 딱 붙인 것, 비뚤어진 것, 물고기처럼 뻐끔대는 것이 있다. 얼굴은 누런 것, 약간 파란 것, 붉은 것, 분처럼 흰 것, 복숭아 빛인 것, 불그레한 것, 밤색인 것, 기미 낀 것, 사마귀 있는 것, 마비된 것, 어루러기가 돋은 것, 혹이 난 것이 있다. 또 물고기 눈에 사자의 코를 한 것, 양 코에 눈썹을 드리운 것, 사자 코에 부릅뜬 눈에 호랑이 입을 한 것이 있다.
눈이 같으면 코가 다르고, 코가 같으면 입이 다르고, 입이 같으면 얼굴빛이 다르며, 모두 같으면 키와 체구가 다르고, 키와 체구가 같으면 자세가 다르다.
나한들은 혹은 서고 혹은 앉고, 혹은 숙이고 혹은 옆의 것에 붙고, 혹은 왼쪽을 돌아보고 혹은 오른쪽을 돌아보고, 혹은 남과 이야기하고, 혹은 글을 보고 혹은 글을 쓰고, 혹은 귀를 기울이고, 혹은 칼을 지고, 혹은 어깨를 기대고, 혹은 머리를 떨구어 근심하는 듯하고, 혹은 생각하는 듯하고, 혹은 기쁜 듯 코를 쳐들고 있다. 혹은 선비 같고, 혹은 관리 같고, 혹은 아녀자 같고, 혹은 무사 같, 혹은 병자 같고, 혹은 어린애 같고, 혹은 늙은이 같다.
천 명이 모인 모임이요, 일만 명이 모인 시장 같다. (하략)
제4부 내가 사는 세상은
걸인의 행패를 물리친 후덕한 성진사 成進士傳(성진사전)
성희룡은 상주(尙州) 사람이다. 집이 본시 넉넉하였는데, 흉년이 들자 식객이 더욱 많아졌다. 계집종이 바야흐로 먹을 것을 차려 소반을 내가는데, 한 계집종이 뛰어오며 말하기를,
“포대기를 짊어진 비렁뱅이가 오더니 까마귀가 병아리 채가듯이 채 같습니다.”
한다. 희룡은
“굶주렸나 보다. 그에게 주어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계집종이 또 뛰어와서 말하였다.
“그릇을 망태기에 넣어 가려고 합니다.”
희룡은
“됐다. 놔둬라!”
하고는 그 비렁뱅이를 불러서 앞에 오게 했다. 비렁뱅이의 얼굴은 도리어 싸움이라도 할 듯한 기색이었다.
“그릇을 팔려는 건가?”
하는 물음에, 비렁뱅이는
“그렇소.”
라고 답했다.
“그걸 내게 팔게.”
“천오백 냥에서 조금이라도 밑지면 안 팔겠소.”
희룡은 청지기에게 명하여 천오백 냥을 내주게 하였다. 비렁뱅이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주인을 쳐다보더니만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자기 아내를 불러 들어오게 하며, 말하였다.
“이분은 사람이 아니야. 부처님이셔!”
그리고는 묶은 것을 풀어 보이는데, 그 속에는 죽은 아이가 있었다. 그는 말하였다.
“내가 남에게 경우 없이 덤비면, 그는 반드시 나를 몰아칠까요. 만일 몰아친다면, 나는 이 죽은 아이를 가지고 그를 협박하죠. 그러면 중한 뇌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소. 이제 그 간책을 쓸 길이 없게 됐소. 당신에게 몸을 상가는 힘이 있기 때문이오. 나 떠나겠소이다.”
드디어 그는 돈과 그릇을 버리고 떠나갔다. 성씨는 결국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조선조에는 유랑민이 많았다. 그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구걸하기도 하고 군도(群盜)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유랑민이 더욱 늘어났다. 그래서 한시와 한문에 그 사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성대중(成大中)의 <개사전(丐師傳)>과 박지원(朴趾源)의 <광문자전(廣文者傳)>은 그 한 예이다.
제5부 아아, 조선의 여성이여
살아 있는 열녀 生烈女傳(생열녀전)
살아있는 열녀 신씨는 본관이 평산(平山)이고 용인 사람이다. 유학(留學) 정(鄭) 아무개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나쁜 병에 걸려 온몸에 종기가 두루 퍼져 그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열녀는 사람의 고기가 흠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남몰래 칼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그것을 구워서 남편에게 올렸다. 그랬더니 종기가 곧 나았고, 열녀의 허벅지 상처도 심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 일로 위로 보고되어, 관에서 그 마을에 열녀문을 세어 ‘열녀 유학 정 아무개의 처 평산 신씨의 문’이라고 하였다. 한양의 남부(南部) 목사동(木寺洞, 목정골)에서 그것을 보았다는 객이 있다.
와사씨가 평론하였다.
여자가 다시 시집갈 수 있는데 시집가지 않는 경우에 열녀가 되는 것이다. 왕촉(王蠋)이 말하기를 “열녀는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부인들이 정절을 지켜서 음란하지 않다. 그렇기에 사대부의 여인들은 비록 초례(醮禮)만 올리고 과부가 되었더라도 다시 집을 가지 않으니, 그것이 법으로 있어 마침내 습속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부끄러움을 아는 이는 모두 이와 같이 한다. 그렇기에 온 나라 안에 홍안(紅顔)으로 소복을 입은 사람은 모두 옛적의 열녀다. 이에 지아비를 잃은 여인 가운데서 골라서 정려문을 세워주기 때문에, 조선의 열녀는 모두 죽은 다음에 되고, 살아서 도설(棹楔, 홍문紅門)이 빛나는 경우가 없었다. 내가 지금 신씨의 경우에서 유일하게 그런 예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섯 아들의 어머니 五子嫗賦(오자구부)
경금자의 이웃에 네 아들을 둔 어미가 있는데, 그녀가 또 해산했다는 말을 듣고, 알아보니 또 사내아이란다. 몸 풀고 이레 만에 일어났는데 얼굴에 아직도 붓기가 있었고, 기뻐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기둥에 기대어 탄식한단다.
계집종을 보내어 축하하니, 그 어미가 발끈 화를 내며 말하였다.
“슬퍼해도 오히려 겨를이 없을 지경인데, 무얼 축하한다고 해서 또 짜증 나게 하는 게요!”
난 그녀가 계면쩍어해서 그런다고 여겼다. 그래서 말하였다.
“사내애를 낳아 다섯이나 되었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겠소?”
그 어미가 말하였다.
“고을에 군정(軍丁)이 하나 더 하니, 관아의 관리야 기쁘겠지만, 가난한 우리 집은 돈이 없는 걸요. 아들을 보았다고 어찌 즐거워하겠어요?”
내가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물었다. 그 어미가 대답하였다.
“하늘은 이미 내 원수이고 귀신도 도와주지 않는군요. 집이 본디 적빈(赤貧)하여 아무것도 없고요. 많은 것은 오직 새끼들뿐이지요. 3년이면 반드시 하나씩 낳아, 둘씩 짝하고도 오히려 하나가 남습니다. 큰애는 겨우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작은애는 이제 소 꼴이나 짊어질 정도구요. 그 밑에 어린 것들은 모두 더벅머리로, 그저 보리밥 한 그릇씩만 축낼 뿐이죠.
아아! 백성에게는 역역(力役)이 있어, 역역마다 각각 세금을 징수하니, 쌀을 내고 보(保, 병역을 부담하는 장정 조직의 단위)를 서야 하죠. 속오(束伍, 조선 후기의 지방군)와 아병(牙兵, 대장군 밑의 군사軍士)이 다 그렇고, 수군이 가장 중요하여, 군사와 군보(軍保, 정군의 비용을 부담했던 보인保人)를 모집한다고 아주 닦달합니다. 낳은 지 고작 석 달이면, 이정(里正, 이장)은 이름을 보고하여, 강보에 쌓인 나이가 관부(官府)에 이름 모르고, 파기(疤記, 사람의 용모나 신체상 특징을 적은 기록 문건)가 즉각 이루어지죠.
급기야 관리가 가을 되기 무섭게 와서는 화급히 돈을 재촉하는데, 새끼 가진 범같이 소리가 사나와, 집 문에 다다라 성난 얼굴로 서 있지요. 큰 아이는 이백 전, 작은 아이는 일백오십 전, 만약 당일 아침 관아에 납부하지 않으면, 관문으로 붙잡아 들어간다고 으름장이죠.
이러니 한 해가 다 하도록 소금을 굽고 일 년 내내 쟁기를 잡지만, 굶주려도 낟알 하나 먹지 못하고, 추워도 비단 실오라기 하나 걸쳐 보지 못한 채 군포를 마련해야 하죠. 그러고도 오히려 기일에 미치지 못하니, 신도 신지 못한 채 얼음을 밟고, 속절없이 혼자서 눈물을 줄줄 흘릴 뿐이어요. 이것을 생각하면 어찌 사내아이가 귀하겠습니까? 사내아이는 정말 귀할 게 없기에, 이래서 슬퍼하는 것이지요.”
내가 그 말을 듣고 불쌍히 여겨, 옛일을 들어 위로하였다.
“아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옛날 한(漢)ㆍ당(唐)에서는 국가가 정벌을 일삼아, 집마다 갑사(甲士, 갑병)를 뽑아 장부에 올리고 호(戶)마다 수졸(戍卒, 수자리 서는 군졸)을 가려서, 호랑이나 들소처럼 내몰고 창과 도끼로 윽박질러, 집에 돌아갈 꿈은 꾸지도 못하고 죽어서 뼈만 늘어졌다오. 지금 생각해도 머리칼이 쭈뼛해질 정도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요순시대를 맞아 백년이나 평화가 계속되어 국가는 전쟁을 말하지 않고 백성은 무기를 알지 못하니, 자손을 어르고 키우면서 각각 자기 천수를 다하오. 오늘날을 기준으로 옛날을 볼 것 같으면 진흙탕과 구름처럼 한쪽은 욕스럽고 한쪽은 영광되오. 그러니 얼마 안 되는 정전(丁錢) 때문에 무어 그리 서글퍼 한단 말이요?”
늙은 어미는 말하였다.
“그렇지 않아요. 그 당시에는 때만 잘 만나면 기린각(麒麟閣, 전한의 무제가 기린을 얻었을 때 건축한 누각)에 얼굴도 그려 올릴 수 있었고, 때를 잃더라도 용사(龍沙, 중국 서쪽의 사막지대로 변방을 뜻하는 말)에 뼈를 드러내는 게 고작이었죠. 어디 돈 없는 근심 때문에 나처럼 훌쩍훌쩍 울고 다니는 일이 있었습니까? 아 제가 보기에 오늘날의 슬픔이 옛날보다 더한 듯합니다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처연하게 울음을 터뜨릴 기색이 되어, 한숨을 푹푹 쉬면서 갔다.
나는 백성이 너무나 고통을 겪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군정이 심하게 문란한 것을 탄식하면서 이 문답을 기록하고 글로 다듬어서, 다른 날 민요 채집자의 보고에 대비하는 바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양민에게만 부과되었으나, 신역(身役)을 대신하는 보인(保人)을 세워 그 대가로 역포(役布) 2필(匹, 쌀 12두斗에 해당)을 징수하였다.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로 양민들은 대동미에다 삼수미(三手米), 잡역미(雜役米), 그리고 각종 별징(別徵)을 합해 일결(一結)에 23두(斗)를 부담하였다.
◎ 이옥 지음, 심경호 옮김,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태학사, 2001
☞ 저자 이옥(李鈺, 1760~1815)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문필 활동을 한 문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字)는 기상(其相)이며, 문무자(文無子) 매화외사(梅花外史) 화석산인(花石山人)을 비롯한 많은 호를 사용했다. 그는 한평생 소품문 창작에 전념하여 발랄하고 흥미로운 작품을 많이 남겼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792년 국왕이 출제한 문장시험에 소품체(小品體)를 구사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불경스럽고 괴이한 문체를 고치라는 하명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뜻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과(日課)로 사륙문(四六文) 50수를 지어 옛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에 응시할 것을 허용한다는 징벌을 받았고, 또 경상도 삼가현에 충군(充軍)을 당한 쓰라린 체험도 하였다. 문체로 인하여 관직 진출이 막혀버렸지만, 그의 문체를 고치지 않았고 신념을 지켰으며 이후 문학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자기만의 개성적인 문체와 내용을 고집함으로써 군주로부터 견책을 당할 만큼 독특한 창작 활동을 보였다. 그러한 그만의 창작 방식으로 인하여 그의 작품들은 조선시대 그가 살아온 시대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을 후대에 남겨주고 있다.
☞ 옮긴이 심경호 국어학자/국문학자
1955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일본 교토 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중국어학 중국문학 전공)을 수료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교수, 강원대 국문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2002년도 성산학술상 수상, 2006년도 일본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 기념 제1회 동양문자문화상 수상, 한국학술진흥재단 선정 제1회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학자로 선정되었다. 2010년에 제 3회 우호 인문학술상을 수상했다. 2010년 일본 메이지대학 객원교수다. 지은 책으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전4권, 공저), '다산과 춘천', '한문산문의 미학',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국문학연구와 문헌학', '김시습 평전', '한시기행', '한시의 세계', '간찰', '한학입문', '산문 기행'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주역철학사', '불교와 유교', '일본한문학사', '금오신화', '당시 읽기', '당시개설', '인간 사마천', '중국자전문학', '중국 고전시, 계보의 미학', '역주 원중랑집'(전10권, 공역), '한자 백 가지 이야기', '문자강화 1', '증보 역주 지천선생집'(전4권, 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