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역사의 원전≫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편저
- [보도자료]
- 2026-01-07
≪역사의 원전≫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편저
2500년의 인류사를 총망라한
180개의 현장 기록을 만나다
서문|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 기록서 존 캐리
1
르포르타주(reportage) 선집을 편집하기 위해서는 르포르타주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또 좋은 르포르타주를 선정하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나는 진작부터 르포르타주란 목격자가 기록한 것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고, 최대한 이 기준에 따라 이 책을 편집했다.
초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점을 연, 월, 일로 명확히 포착할 수 있는 사건의 기록을 우선적으로 뽑았다. 먼 옛날이나 시간 의식이 불명확한 종류의 사건에 대해서는 이 기준을 잡아 두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시점 표시의 원칙을 지켰다. 기록자는 개인이라도 기록은 공공성을 가진 것이다. 때문에 기록의 대상은 의식이나 상상이 아닌 세계 표준시간의 시계 위에 딱 자리 잡은 것이어야 한다.
물론 수록된 대부분의 기록은 역시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것이다.
2
이 기록들은 역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반화를 겪지 않은 역사다. 필자들은 식견이 제한된 사람들이다. 해석의 덧칠이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원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놀라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모습을.
1 아테네의 역병 BC 430 투키디데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이 질병은 이집트 너머의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했고 후에 이집트와 리비아로 내려와 (이집트) 왕의 영토 태반이 그 침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테네시에 들이닥쳤는데,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은 것은 페이레우스의 주민들이었다. 나는 이 병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묘사하고 증세를 설명할 것이니,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미리 알고 있음으로 해서 이 병이 행여라도 다시 터져 나올 경우 알아볼 수 있기 바란다. 나 자신이 이 병을 앓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앓는 것을 목격한 바 있다.
그해에 이 병을 빼놓고 질병이 유난히 없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다. 어떤 병이라도 걸린 사람은 모두 이 병으로 옮겨 갔다. 혹은 건강하던 사람도 아무런 분명한 이유 없이 갑자기 이 병에 걸렸다. 처음에는 머리에 몹시 열이 나고 눈에 충혈과 염증을 일으키며 입 안, 혀와 목구멍 양쪽 다 핏빛으로 붉게 변하고, 숨에서 부자연스럽고 고약한 냄새가 나게 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재채기가 나고 목소리가 쉬며, 조금 지나면 병이 가슴으로 내려와 걷잡을 수 없는 기침에 시달리게 된다. 배까지 내려오면 속이 온통 뒤집혀 의사들이 아는 모든 분비물까지 토해내며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많은 경우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 헛구역질이 뒤따르는데, 더러는 금방 멈추기도 하지만 꽤 오랫동안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 보면 환자의 몸은 그리 뜨겁지 않다. 창백하지도 않고 검푸른 남빛에 붉은 기가 돌며, 작은 물집과 종기가 돋아난다. 그러나 몸 안에는 열기가 넘쳐흘러서 환자는 홑이불 한 장 덮는 것도 견뎌내지 못하고,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가라앉지 않는 갈증에 시달려 찬물에 뛰어드는 것이 그저 소원이다. 실제로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환자들이 물통에 많이뛰어들었다. (하략)
12 리처드 1세의 포로 학살 1191. 8. 2~20 사라센 사람이 본 십자군 베하 에드딘
같은 날 잉글랜드인과 같이 일하는 통역 호삼 아드딘 이븐 바리치가 잉글랜드 왕(리처드 1세)의 관리 두 명과 함께 아크레에서 나왔다. 그는 프랑스 왕이 티레를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고, 자기들이 온 목적은 포로 교환 가능성을 의논하는 것, 그리고 예수 수난의 원(原) 십자가가 무술만 진영에 그대로 있다면 그 십자가를 보고, 바그다드로 옮겨졌다면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원 십자가를 보여주자 그들은 온몸이 먼지에 덮이도록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 헌신의 뜻으로 정중한 절을 올리는 등 극진한 경의를 표했다. 조약에 명기된 모든 것을 한 달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쳐 교환하자고 하는 술탄(살라딘)의 제안을 유럽의 군주들이 수락했다고 그 사절들은 말했다. 그러자 술탄은 많은 향수와 좋은 옷 등 풍성한 선물을 가진 사절을 티레로 보냈으니 모든 선물은 프랑스 왕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라자부 월 10일(8월 3일) 아침 이븐 바리크와 그 동료들은 잉글랜드 왕에게 돌아갔다. 항구적 평화의 기초를 닦는다는 희망을 가지고 두 진영 사이에 사절들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조약에 따라 첫 번째 인도 대상으로 정해진 숫자의 포로와 정해진 금액의 돈을 우리 편에서 준비해 놓을 때까지 협상이 계속되었다. 첫 번째 인도에는 원 십자가와 10만 디나르 돈, 그리고 1,600명의 포로가 포함되도록 약속되어 있었다. 검수(檢數)를 위해 기독교들이 보낸 믿을 만한 사람들은 모든 사항이 충족되었음을 확인하였지만, 이름을 정해 요구한 포로들을 아직 다 모아 놓지 못한 일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협상은 첫 번째 인도의 기한이 채워지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라자부 월 18일(8월 11일)인 그날 적군은 약속 이행을 요구해 왔다.
술탄은 이렇게 대답했다.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시오. 한 가지는 우리 동료를 돌려보내 주고 이번 기한에 해당되는 우리가 보낼 것을 받는 것이요. 그 경우 우리는 미진한 내용을 충족시킬 보장으로서 인질을 맡길 것이오. 다른 한 가지는 우리가 보내는 것을 당신들이 받고, 대신 우리에게인질을 보내 당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는 우리 동료들을 돌려보낼 때까지 맡겨 놓는 것이오.” 이에 대해 사절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약속된 것을 우리에게 보내면 그 대신 당신네 사람들을 돌려보내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해주겠소.”
술탄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우리 사람들이 기독교도들에게 잡혀 있는 채로 돈과 원 십자가, 그리고 그쪽 포로들을 그가 돌려보낸다면 적의 배신을 막을 보장이 없을 것이며, 이것은 이슬람에게 커다란 재앙이 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잉글랜드 왕은 술탄 때문에 조약의 이행이 지연되는 것을 보고, 무술만 포로들을 배신하는 행인을 저질렀다. 그들이 아크레 도시를 내놓을 때 왕은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었다. 술탄이 거래에 응한다면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날 수 있게 할 것이며, 술탄이 응하지 않을 경우 그들을 노예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왕은 그들에게 했던 약속을 내던지고 지금까지 감춰뒀던 속셈을 드러내, 우리의 돈과 기독교도 포로들을 돌려받은 뒤에 이행하려고 확정했던 일을 미리 저질렀다. 이것은 그 나라 사람들도 결국 인정한 일이다.
화요일인 라자부 월 27일(8월 20일) 오후 4시경 왕은 기사와 보병, 성 요한 경기병을 포함하는 기독교군 전부를 이끌고 말을 타고 도시를 나섰다. 그들은 알 아야디예 언덕 아래 저지대로 나갔는데, 왕은 그곳에 이미 텐트를 보내 놓았었다. 술탄의 전위부대는 케이산 언덕 부근으로 퇴각해 있었다. 알 아야디예 언덕과 케이산 언덕 사이에 펼쳐진 평야의 가운데에 이른 기독교도들은 신께서 순교의 날을 그날로 정해 주신 무술만 포로들을 모두 앞으로 데려오게 했다. 그 숫자는 3,000명이 넘었고 모두 밧줄로 묶여 있었다.
그런 뒤 기독교도들은 갑자기 그들에게 달려들어 칼과 창으로 냉혹한 학살을 시작했다. 우리의 전위부대는 적군의 움직임을 술탄에게 보고했고 술탄은 얼마간의 병력을 증파했지만, 그것은 학살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무술만 병사들은 그들이 포로에게 하는 짓을 보고 황급히 기독교도들을 쫓아갔고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된 전투를 통해 양측에서 사상자가 여럿 나왔다. 다음 날 아침 우리 사람들이 그 장소에 모여 보니 믿음의 순교자가 된 무술만 사람들이 땅 위에 널려 있었다. 죽은 사람 중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에게 죽은 사람의 모습은 큰 고통이었다. 적군은 신분이 높은 포로와 일 시키기 좋은 튼튼한 사람들만 남겨 놓았다.
이 학살의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무술만 사람들이 앞서 죽인 기독교도들의 복수를 위해 포로들을 죽였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잉글랜드 왕이 아스칼론 공격을 결정하면서 자기가 떠난 뒤 너무 많은 포로를 그 두 도시에 남겨 두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22 카이로 거리의 당나귀 1516 존 레오
편저자 주 | 그라나다 출생의 존 레오는 모로코에서 성장했고 젊은 시절 북아프리카 지역을 널리 여행했다.
벱 엘로크라 부르는 교외 지역은 카이로 성벽에서 1마일가량 떨어진 것으로 3천 가구 가까이 그곳에 거주한다. 상인들, 그리고 각종 장인들이 대부분이다. 이 지역의 한 곳에 커다란 궁전과 웅장한 학교가 있는데, 당시 술탄의 고문인 자스바크라는 이름의 귀족이 지은 것으로서 그의 이름에 따라 자스바키아라고 부른다.
마호메드의 가르침에 따른 설교와 기도가 끝난 뒤에는 카이로의 시민들, 그리고 갈보와 창녀들이 이곳으로 많이 놀러 온다. 광대 패들도 많이 오는데, 그중에는 낙타, 당나귀나 개에게 춤을 추게 하는 자들도 있다. 이런 춤은 아주 보기 좋은데, 그중에서도 당나귀의 춤이 제일 좋다. 춤을 한바탕 춘 뒤에 당나귀 주인이 당나귀에게 다가와 큰 소리로 말한다. ‘술탄이 커다란 궁전을 막 지으려 하는데, 카이로의 모든 당나귀를 모아 석재(石材)와 회(灰) 등 필요한 재료를 옮기게 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당나귀는 당장 바닥에 누워 네 발굽을 하늘로 향하고 배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고 눈을 감아 죽은 시늉을 한다. 그동안 주인은 당나귀의 불행을 관중들에게 한탄하며 ‘새 당나귀를 살 돈에 한 푼이라도 보태달라’고 사정한다. 그리해서 돈을 모을 만큼 모은 뒤에 주인은 말하기를, ‘우리 당나귀가 죽었다고 생각한 나으리들은 홀딱 속으신 겁니다. 저 녀석이 배는 고픈데 주인 형편이 궁한 것을 아니까 자기 여물 살 돈을 얻으라고 저 재주를 피우는 겁니다’라고 중얼대고는 당나귀에게 돌아가서 ‘얼른 일어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치고 두드려도 당나귀는 꼼짝 않고 누워 있다. 그러자 주인은 관중들에게 돌아서며 말한다. ‘여러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일 사람들이 모두 시내로 가서 개선행사를 구경하게 되어 있습죠. 거기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부인들이 가장 멋진 당나귀를 타고, 당나귀에게 좋은 귀리를 먹여주고 나일강의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해준다면서요?’
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당나귀는 벌떡 일어나 기쁨에 넘쳐 펄쩍펄쩍 뛰었다. 주인은 관중에게 대사를 계속 읊었다. ‘우리 마을 촌장이 우리 착한 당나귀를 빌려서 늙고 불구인 자기 아내를 태우겠다는군요.’ 이 말을 들은 당나귀는 마치 사람의 이성을 가진 존재처럼 귀를 접고는 다리 하나가 부러진 것처럼 절룩거려 보였다.
그러자 주인이 당나귀에게 물었다. ‘아니, 나귀 씨,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가 좋다는 거요?’ 당나귀가 그렇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떡이자, 주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 여기 둘러선 예쁜 아가씨들 중에 누가 제일 마음에 드는지 짚어보게.’ 그러자 당나귀는 관중들로 걸어가다가 비교적 예쁘고 멋진 여인을 찾아서는 곧바로 다가가 머리로 건드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리고 소리를 질렀다. ‘보라, 당나귀 같은 애인이요 애인 같은 당나귀로다!’ 이때 이 여흥을 보여주던 자는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다른 장소로 향했다.
31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1586. 2. 8 로버트 윙크필드
여왕의 기도가 끝나자 형리(刑吏)들은 무릎을 꿇고 여왕 폐하에게 자기들의 역할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다. 여왕은 대답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대들을 용서하노라. 이제 자네들이 나의 모든 괴로움을 끝내 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여왕의 시녀 두 사람과 함께 여왕을 부축해 일으키고 여왕의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왕이 십자가를 걸상에 놓을 때 형리 하나가 그 목에서 예수의 상징인 어린 양 상(像)을 벗겨내자, 여왕은 그 손을 떼게 하고 시녀 하나에게 주면서 형리에게는 그 대신 돈을 받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형리와 시녀들이 향목 염주로부터 시작해 모든 겉옷을 벗기도록 몸을 맡겼는데, 그 흔쾌한 태도는 슬픔보다 기쁨을 느끼는 사람 같았다. 옷을 벗기는 데 협조적인 동작을 취했고, 벗겼던 토시를 손수 도로 꿰는 데는 그 서두르는 폼이 마치 어서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옷을 벗기는 동안 내내 여왕의 신색(身色)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즐거운 미소까지 지으며 이런 말을 했다. “이렇게 옷을 벗겨 주는 서방도 가진 적이 없었고, 이렇게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어 본 적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왕이 속옷과 가운만을 남기고 모든 옷을 벗자, 시녀들은 그를 바라보며 커다란 슬픔 속에 눈물을 흘리며 성호(聖號)를 긋고 라틴어로 기도를 올렸다. 여왕은 그들에게 몸을 돌려 품에 안으며 프랑스어로 말했다. “울지 말거라. 너희를 위해 내가 기도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호를 그어 주고 키스한 다음, 자신을 위해 기도하되 울지 말고 기뻐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주인인 자신이 고통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뒤 여왕은 멜빈을 비롯한 남자 시종들에게 웃음 띤 얼굴을 보여줬다. 처형대 가까이에 있는 벤치 위에 서 있던 시종들은 눈물을 흘리다가 소리 내 울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성호를 그으며 라틴어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여왕은 손을 들어 그들에게 성호를 그어주고 작별 인사를 전한 다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고 나서 세 모퉁이를 접은 성체 보자기를 들고 있던 시녀 하나가 보자기에 키스를 한 다음 스코틀랜드의 여왕 머리에 씌우고 핀으로 고정시켰다. 이제 두 시녀가 물러나자, 여왕은 더없이 결연한 태도로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죽음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의 표시도 없이 라틴어로 찬송가를 소리 내 읊었다. “In Te Domine confido, non confundar in eternam……” 그런 다음 도마를 더듬어 찾아 머리를 올려놓았는데, 도마 밖으로 걸친 턱을 두 손으로 잡고 있어서 만약 형리들이 눈치채지 못했다면 턱을 잡고 있는 채로 손이 잘렸을 것이다. 아주 조용히 도마 위에 엎드려 있던 여왕은 두 팔을 뻗치며 “In manus tuas, Domine……” 소리를 서너 차례 외쳤다.
그런 뒤 형리 하나가 한 손으로 여왕의 몸을 살짝 잡고 있는 상태에서 여왕은 도마 위에 잠잠히 엎드려 있는 채로 다른 형리가 휘두르는 도끼날을 맞았는데, 아주 조그만 소리를 냈거나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몸의 어느 부위도 엎드려 있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여왕의 머리는 형리의 도끼날로 몸에서 잘렸고, 물렁뼈 한 조각만이 이어져 있던 것을 마저 잘라낸 형리는 그 머리를 치켜들어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주님이여, 여왕을 보우하소서” 하고 외쳤다. 그때 여왕의 머리에서 천 조각이 벗겨져 떨어지자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70세 노파의 머리카락처럼 잿빛으로 보였고, 그 얼굴은 살아 있을 때의 표정과 너무나 다르게 순식간에 변해 버려서 죽은 얼굴을 보고 원래의 얼굴을 기억해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 입술은 머리가 잘린 지 15분 후까지 아래위로 실룩거렸다. (하략)
56 샤토브리앙의 신세계 상륙 1791 체서피크 만에서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우리는 제일 가까운 집으로 걸어갔다. 볼섬 나무와 버지니아 삼나무 숲의 모습과 그늘, 그리고 앵무새와 풍금조(風琴鳥)의 노랫소리와 색깔이 우리가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반 시간 후 우리가 도착한 집은 영국 농가와 서인도 오두막의 트기 같은 모양이었다.
울타리로 막아 놓은 목초지에서는 유럽산 암소가 떼를 지어 풀을 뜯고 있었고 울타리 위에서는 줄무늬다람쥐가 놀고 있었다. 흑인들은 목재를 톱질하고 있었고 백인들은 담배 농사를 살피고 있었다.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열서너 살쯤의 흑인 여자아이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대단히 아름다운 밤의 여신 같았다. 옥수수떡, 닭, 달걀, 우유 등을 사서 큰 병과 바구니에 담아 배로 돌아왔다. 비단손수건을 아프리카 여자아이에게 주었다. 자유의 땅으로 나를 맞아들인 것은 이 노예였다.
* 샤토브리앙(1768~1848)은 프랑스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초기 낭만주의 저술가로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혁명의 행로가 혼미하던 1791년 4월 기병대 장교였던 그는 왕당파 참여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떠났으나 몇 달 후 루이 16세가 탈주 실패로 곤경에 빠진 소식을 듣고는 왕에 대한 의리를 다시 떠올리며 귀국했다. 미국 체류 중 모피상들과 함께 오지를 여행하고 인디언을 직접 관찰한 것이 당시 유럽인으로서는 진기한 경험이었고 그의 저술에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68 굴뚝 소년의 죽음 1813. 3. 29 1817년 의회 굴뚝소년 위원회에서 채택한 증거
1813년 3월 29일 월요일 아침, 그릭스라는 이름의 굴뚝 청소부는 어퍼 템스 스트리트에 있는 캘버트 회사 양조장의 조그만 굴뚝 하나를 청소하러 갔다. 그는 자기 밑에서 일하는 아이들 중 하나를 데리고 갔는데, 8살 가량의 나이로 토머스 피트라는 이름이었다.
그날 아침 2시에 피웠던 불은 그릭스와 아이가 8시에 도착할 때까지 타고 있었다. 난로는 작은 것이었고 연도(煙道)가 조금 들어간 곳에 쇠살대에서 빠져나온 파이프 하나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청소부는 (그 양조장의 굴뚝을 몇 해 동안 청소해 왔으므로) 지붕의 기와 한두 장을 깨뜨리고 아이에게 굴뚝을 내려가도록 했다.
그 결과는 짐작할 만한 것으로, 아이는 곧 죽었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굴뚝은 매우 좁은 데다가 열기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설령 새빨갛게 달궈져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 쇠살대의 파이프까지 오지 않았더라도 되돌아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검시(檢屍) 과정에서 명백하게 확인된 것이 아니지만 시체의 상황으로 보면 아이가 파이프에 눌린 것은 피할 수 없었던 사실로 보인다.
아이가 내려간 후 굴뚝 위에 남아 있던 청소부는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에게 도로 올라오라고 했다. 아이는 “올라갈 수가 없어요, 아저씨. 저는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어요” 하고 대답했다. 아이가 굴뚝 안에 갇혔다는 경보(警報)를 즉각 양조장에 전했고, 가까이서 일하고 있던 벽돌공 하나가 불려와 난로 바로 위의 벽 일부를 부숴 아이를 꺼낼 수 있는 구멍을 뚫었다. 의사도 불려왔지만 아이를 살려내려는 모든 노력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시체를 검사해 보니 여러 가지 화상이 나타났다. 다리 중에서 살이 많은 부위와 발이 제일 많이 타 있었다. 굴뚝소년들이 움직이는 데 제일 효과적으로 쓰이는 부위, 즉 무릎과 팔꿈치는 뼈까지 타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이것으로 볼 때 불쌍한 희생자는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깨닫자마자 이를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애를 쓴 것으로 보였다.
* 굴뚝 청소에 동원되는 아이들은 여섯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더위와 밀실 공포에 극심하게 시달렸고, 화상과 질식, 추락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72 워털루, 결판의 순간 1815. 6. 18 J. 킨케이드 대위
저녁 7시경 싸움터에서 벌어졌던 한 장면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맥이 빠지고 기력이 없는 상태였는데, 피로보다 걱정 때문이었다.
전투가 시작될 때만 해도 5,000명 이상이었던 우리 부대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외줄의 소총 사선(射線)만 남게 되었다. 27연대는 우리 몇 야드 뒤에 문자 그대로 뻗어 있었다. 다리에 총알 한 방을 더 맞고, 또 한 방이 안장을 뚫고 몸 안에 들어가 저세상으로 떠나버렸다.
짙은 연기가 아직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선의 양쪽 끝으로 걸어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람과 말의 뭉개진 시체밖에 없었고, 나는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전원이 전사(戰死)하는 전투라는 것을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차례로 죽어 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이번은 예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생략)……
갑자기 영국군의 것으로 들리는 함성이 오른쪽 먼 곳에서 시작되어 모두의 귀를 쫑긋거리게 했다. 오랫동안 고대해 온 웰링턴 경의 진격 명령이었다. 함성은 차츰 가까워지면서 더욱 커졌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함성에 동참하면서 울타리를 뚫고 적군을 창검으로 물리치면서 앞의 언덕으로 돌진했다. 그 순간 웰링턴 경이 말을 몰고 나타났고, 우리 병사들이 환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장군은 소리쳤다. “환성은 그만두고 앞으로! 우리의 승리를 마무리 짓자!”
돌격해 나감으로써 연기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파괴의 와중에서 여러 시간 동안 어둠에 싸여 있으면서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잔뜩 쌓여 있던 사람들에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대단한 만족감을 주는 것이었다. 해 질 무렵의 화창한 여름날 저녁이었다. 프랑스군은 오합지졸이 되어 도망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눈 닿는 데까지 프랑스군의 뒤를 바짝 뒤쫓는 영국군의 대오는 탄복할 만한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왼쪽 들판에는 프러시아군이 가득했다.
적군은 우리 오른쪽 라 벨 알리앙스의 고지를 근거로 마지막 한 차례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애덤 장군의 여단이 한 차례 돌격하자 다시 혼란에 빠지고 그 혼란이 이번에는 수습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들의 몰락은 완벽한 것이 되었다. 대포, 보급품, 그들의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떨어졌다. 어두울 때까지 그들을 추격하다가 싸움터를 2마일가량 넘어선 곳에서 우리는 정지하고, 프러시아군에게 승리의 마무리를 맡겼다.
89 세포이 항쟁 1 1857년 7월 21일 콘퍼의 부녀자-아동 학살 현장 해블록 구원대의 한 장교
불쌍한 여성들이 살해된 건물로 안내되어 갔습니다. 나나 족장(族長)이 살던 콘퍼 호텔 옆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참혹한 꼴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온 집이 피바다였습니다. 제 장화창이 그 가엾은 사람들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장이 아닙니다. 옷과 옷깃, 애들 양말, 부인용 둥근 모자 따위가 여기저기 흩어져 피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나무 기둥의 칼자국에는 칼날에 묻어 옮겨진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붙어 너펄거리고 있었습니다. 보기에 너무나 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가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그 뒤에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모든 군인을 그곳에 데려가, 우리 불쌍한 여성 동포들이 당한 참혹한 짓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체는 나중에 끌고 나가 건물 바깥에 있는 우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우물 위로 시체의 팔다리가 울쑥불쑥 튀어나와 있었습니다……(생략)……
그 가엾은 여인들이 살해당한 것은 15일, 우리가 교량에서 반도들을 격퇴시킨 뒤였습니다. 그들의 살해를 명령한 두목놈은 그저께 포로로 잡혔고, 지금은 길에서 200야드 떨어진 위치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죽음은 극히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밧줄 매듭을 잘못 메어서, 그가 떨어질 때 올가미가 그의 턱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 묶은 것이 풀려서 밧줄을 붙잡고 올가미를 풀려고 버둥거렸습니다. 두 사람이 그의 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목이 부러질 때까지 잡아챘습니다. 야만스러운 범죄에 대한이 지상에서의 보답으로 합당한 것이었다고 제게는 생각됩니다.
* ‘세포이Sepoy’란 영국 동인도회사가 조직한 인도인 부대와 그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인도인 군대의 봉기로 일어난 1857~58년간의 항쟁을 영국인들은 ‘세포이 항명사태Sepoy Mutiny’라 부른 것은 그 의미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그 후의 인도 독립운동가들은 이 항쟁을 독립전쟁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103 샌프란시스코 지진 1906. 4. 18일 잭 런던
샌프란시스코가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추억, 그리고 외곽의 주택 약간뿐이다. 공업구역은 없어졌다. 유흥가와 주택가도 없어졌다. 공장과 창고들, 대형 상점과 신문사 사옥들, 호텔과 대저택들도 모두 없어졌다. 샌프란시스코라 불리는 도시의 외곽 주택가가 여기저기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다.
지진의 충격 1시간 후에 이미 샌프란시스코가 뿜는 연기는 100마일 밖에서도 보이는 무시무시한 기둥이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밤 사흘 낮 동안 이 연기의 탑은 하늘을 휘저으며 태양을 붉게 만들고 하늘을 검게 만들고 땅 위를 연기로 채웠다.
화요일 아침 5시 15분에 지진이 닥쳤다. 1분 후에는 불길이 여기저기서 치솟고 있었다. 마켓 스트리트 남쪽 근로층 빈민가의 십여 개 장소와 몇몇 공장에서 화재가 시작되었다. 불길을 가로막을 방법이 없었다. 조직도 없고 통신도 없었다. 20세기 도시의 모든 교묘한 장치가 지진으로 파괴되어 있었다. 도로는 구겨져서 언덕과 골짜기가 되었고 무너진 벽의 잔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철로는 휘어서 수직 수평으로 마구 엇갈려 있었다. 전화와 전선은 마비되어 있었다. 대형 수도관은 터져 있었다. 30초간 지각이 꿈틀댄 결과 인간의 모든 영리한 계획과 대책이 쓸모없게 되어 있었다.
화요일 오후 2시, 열두 시간도 안 지난 시점에서 중심가의 절반이 사라져 버렸다. 그때 나는 만(灣)의 바닷물 위에서 이 거대한 화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잠잠한 날씨였다. 한 가닥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모든 방향에서 바람이 시내로 불어 들어가고 있었다. 동, 서, 남, 북, 모든 방향에서 강한 바람이 죽어가는 도시로 모여들고 있었다. 가열된 공기의 상승이 거대한 흡입력을 발휘한 것이었다. 이렇게 불은 대기 속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굴뚝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 밤이고 낮이고 잠잠한 날씨는 계속되었지만, 불길 가까이에서는 태풍처럼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참으로 엄청난 흡입력이었다. (하략)
108 타이태닉호 1 1912. 4. 15 어느 화부(火夫)의 이야기 해리 시니어
충돌을 느낄 때 나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한 친구가 말했다. “여, 어디 부딪혔나 봐.” 갑판에 올라가 보니 앞갑판 쪽 중간갑판 위에 커다란 얼음 더미가 있었지만 배가 그리 빨리 가라앉으리라는 생각은 못 하고 침상에 돌아가 누웠다. 그런데 화부 하나가 뛰어 내려와서 소리쳤다. “전원 구명정으로!” 갑판으로 뛰어올라가니 선장이 말했다. “화부들은 중간갑판에서 올라오지 말라. 올라오는 자가 있으면 쏘겠다.”
그때 첫 구명정이 내려지는 것이 보였다. 남자 열하나와 여자 둘, 열세 명이 타고 있었다. 세 사람은 백만장자였고 한 사람은 이즈메이였다. 〔화이트스타해운회사의 브루스 이즈메이 전무는 생존자였다〕
나는 비상갑판으로 달려 올라가 고무보트 하나를 중간갑판으로 던져 내리는 일을 거들었다. 이탈리아 여자 하나가 아기 둘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아기 하나를 받아 안고 여자에게 바다로 뛰어들게 한 다음 나도 아기를 아는 채 물로 뛰어들었다. 수면 위로 올라가 보니 안고 있는 아기는 죽어 있었다. 여자가 잘 헤엄쳐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배의 보일러 하나가 터지면서 큰 물결을 일으켰다. 그 물결을 본 여자는 단념했다. 안고 있는 아기가 죽었으므로 놓아버렸다.
빈 시간 가량 헤엄쳐 다녔는데, 등헤엄을 치고 있으면서 타이태닉호가 물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어느 보트에 올라가려 하자 한 녀석이 노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사람이 너무 많이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기어 올랐다.
119 전장에 처음 나타난 탱크 1916. 9. 15 버트 체이니
땅을 이상하게 올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생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기계 괴물 세 마리가 우리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내가 받은 첫 느낌은 금방이라도 코를 받고 앞으로 엎어질 것 같다는 것이었는데, 꼬리와 뒤쪽의 작은 바퀴 두 개가 그놈들을 붙잡아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거대한 금속 덩어리인 그놈들의 양쪽은 캐터필러 바퀴가 몸체를 온통 휘어감고 있었다. 양쪽이 튀어나와 있고 튀어나온 곳에 문이 하나씩 있었으며, 회전포가(回轉砲架) 위에 안장(鞍裝)한 기관총이 양쪽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휘발유 엔진이 내부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 뒤마다 오토바이식 안장이 하나씩 있었고 탄약띠를 넣고 운전병들 앉을 자리가 겨우 남았다……(생략)……
우리에게 할당된 세 대의 탱크는 독일군 진지를 향해 나아가는 대신 우리의 전선에 걸치고 멈춰 서서 우리 오른쪽 왼쪽으로 지독한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퍼붓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놈들이 코를 하늘로 쳐들고 버티고 앉아서는 회전포가를 돌려가며 미친 듯이 기관총을 쏘아대 우리 참호의 벽을 뭉개놓고 있었다.
모두가 뛰어서 몸을 숨기고 대령님만 남았다. 대령님은 흙벽 위로 뛰어올라가 목청껏 소리쳤다. “전령, 전령, 가서 저 탱크들 사격을 당장 중지하라고 해. 당장 말이야.” 그때 적군의 사격은 거세지고 있었는데도 탱크들이 우리 편에 대고 쏘아대는 것을 본 대령님은 자신의 안전도 돌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 탱크 한 대의 옆구리를 지팡이로 마구 후려쳐 탱크병들의 주의를 끌려 했다.
엔진 소리와 사격 소리에 파묻혀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탱크병들은 대령님이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공격하고 있는 참호가 틀린 것임을 마침내 깨달았다. 결국 앞으로 나아가 독일 놈들이 혼비백산에서 호랑이 앞에 토끼처럼 달아나게 만들었다.
146 아우슈비츠 가스실 1941. 12. 25 소피아 리트빈슈카
편저자 주 | 최대의 나치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 도시의 오슈비엔침 부근에 있었다. 제1수용소는 1940년 4월 27일 H. 힘러에 의해 세워졌다. 이듬해 10월에는 부근의 브레징카 마을 밖에 ‘비르케나우’라고도 불린 제2수용소가 세워졌고, SS는 이곳에 거대한 처형 시설을 만들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수에 대해서는 100만에서 250만에 이르기까지 엇갈리는 의견들을 보인다.
크리스마스 전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병원동인 제4병동에서 대규모 선별 작업이 있었습니다. 회슬러가 감독한 이 선별 작업의 대상은 3,000명 이상의 유대인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는 병상에서 급하게 일어나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두 의사, 에나와 쾨니히를 대동한 회슬러 앞에 차렷 자세로 서야 했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사람은 번호를 적어 갔는데, 그것이 죽음의 운명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몸매가 보기 좋지 않거나 너무 여윈 사람들, 그리고 무슨 이유로든 그 신사분들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도 번호를 적어 갔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습니다. 내 번호도 적어 갔습니다. 우리는 제4병동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제18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저녁 5시 반경 트럭이 와서 우리는 짐승처럼 벌거벗은 채로 트럭에 태워져 화장장(火葬場) 건물로 갔습니다.
화장장에 도착한 뒤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트럭이 서자 마치 감자나 석탄 짐 내릴 때처럼 짐칸을 기울여 우리를 쏟아냈습니다. 우리가 끌려 들어간 방은 샤워장같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수건도 걸려 있고 샤워꼭지도 있고 거울까지 있었습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있었기 때문에 방 안에 사람이 모두 몇이나 있었는지도, 문이 닫혀 있었는지도 확실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서로에게 소리지는 사람들도 있었고, 서로 주먹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 힘센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약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꼭대기의 아주 조그만 창문에서 연기가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격렬한 기침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고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으며, 목을 졸리는 것 같은 느낌이 일어났습니다.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쳐다볼 틈도 없었습니다.
그다음으로 기억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순간에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습니다. 나는 소리 내 대답할 기운이 없어서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누가 나를 붙잡아 그 방에서 끌고 나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회슬러가 내 몸에 담요를 둘러 주고는 모터사이클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갔고, 거기에서 6주일 있었습니다. 가스 때문에 두통과 심장 장애를 자주 겪었고, 맑은 공기를 쐴 때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그 후 나는 정치부로 옮겨졌는데, 내가 가스실을 벗어난 까닭은 아우슈비츠에 앞서 루블린의 감옥에 있었던 것이 무슨 이유가 된 것인지 모르겠고, 그밖에는 내 남편이 폴란드 장군이였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163 러시아군의 여름 공세 1944. 7 알렉산더 베르트
오늘 모스크바에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매일 밤 어떤 때는 한 차례, 어떤 때는 두 차례, 어떤 때는 세 차례씩이나 귀에 익은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군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과 같은 이 장중한 목소리는 중요한 새 승전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로부터 10분 후에는 축포가 터지고 수천 발의 폭죽이 여름 밤하늘을 밝힌다. 똑같은 광경이 매일같이 그대로 반복되지만 그 흥분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이제 러시아군이 탈취하고 있는 도시들은 머나먼 리투아니아나 벨로루시 서부에 있는 곳들이다. 그리고 매일 밤 수백만의 러시아 가정에서는 작은 종이 깃발과 색줄, 색연필로 적군에게서 해방된, 갈수록 커지는 소비에트 영토를 지도에 표시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진행 중인 독일군의 붕괴는 스탈린그라드 이래 독일에게 최악의 재앙이다. 사상자는 계속 늘어나 50만 선(線)을 바라보고 있다. 사단이 하나하나씩 포위당해 박멸되면서 수십만이 죽어 나가고, 포로로 잡힌 것이 10만가량 되었다. 포로가 된 장군만도 스물다섯이나 되었다. 10만이 넘는 포로 가운데 5만 7,000이 자기네 장군들을 앞세우고 모스크바 시내를 행진했다. 경마장에 이틀 동안 수용해 놓고 먹을 거 마실 것을 넉넉히 주었을 뿐 아니라 음악회까지 열어주었다. 그런 뒤 각각 1만 내지 1만 5,000명으로 된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눠 기차역으로 데려갔다. 10층짜리, 12층짜리 아파트가 줄지어 선 모스크바 외곽의 넓고 밝은 가로에는 독일군을 구경하러 나온 수십만 인파가 늘어섰다. 가벼운 여름 드레스, 대개 흰색으로 걸쳐 입은 처녀들, 목이 트인 흰 셔츠에 가벼운 바지를 입은 청년들, 그리고 어디에나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가로등 기둥이나 자동차 위, 그리고 서 있는 전차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작은 집들의 지붕 위에도 아이들이 있었다. 모스크바는 햇빛 속에 더없이 밝은 모습이었고, 그 넓은 현대적 가로(街路)에는 포탄의 상흔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독일 포로들이 자기네 수도 상황을 떠올린다면 마음이 적지 않게 괴로웠을 것이다.
모스크바 군중은 놀랄 만큼 점잖았다. 지저분한 녹회색 제복의 독일군이 걸어가는 것을, 걷는다기보다 몸을 질질 끌고 가는 것을 그들은 바라보고 서 있었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저 녹회색의 곰팡이가 유럽 러시아의 절반을 좀 먹어 들어왔었고 아직도 유럽의 상당 부분에 퍼져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독일군은 비굴한 모습으로 걸어갔다. 나이 어린 축의 병사들은 모스크바의 풍경에 놀란 눈치였는데, 아마 전혀 다른 모습을 상상했던 모양이었다. 길 양쪽에 들어선 사람들의 깨끗하고 쾌활하고 영양 상태가 좋은 모습에도 놀란 것 같았다. 몇 명의 포로들은 눈을 부라렸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욕설도 야유도 없이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고, 몇몇 젊은이들만이 소리치고 있었다. “야, 저 독일 돼지들 봐라! 저 못난 주둥이들 봐라!”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 어깨 위에 무등을 탄 조그만 여자아이의 말이 들렸다. “엄마, 저게 아빠 죽인 사람들이야?” 어머니는 말없이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173 한국전쟁 1 1950. 10. 17 남찬잔 부근의 민간인 희생 레지널드 톰슨
편저자 주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유엔이 남한 편에서 참전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을 도와주었다. 500만가량의 사람들이 죽은 후 1953년 7월 27일에 당시 남북간의 경계선을 고정시키는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났다.
우리는 아질 씨 가족과 함께 갔다. 길은 헐벗은 논 사이를 달리다가 깊은 도랑을 건너는 다리에서 언덕 굽이를 에둘러 구부러져 흥소리(里)로 향했다.
먼저 전쟁의 비극부터 적겠다. 카빈총의 째지는 소리와 한두 차례 자동화기를 쏟아붓는 소리가 오른쪽 멀리 어디에선가 들려왔고, 농사꾼 여인 하나가 길가의 도랑에 거꾸러지는데, 아기 둘이 그녀의 몸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누워 있는 여인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평화로운,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죽어 있는 것이었다.
한 아기는 여인의 배 위에 앉아 조그만 손을 뻗쳐 여인의 입술을 만지고 잡아당기다가 차츰 불안해진 듯 괴로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따뜻한, 젖이 차 있는 여인의 가슴에 매달려 젖꼭지를 빨아 여인을 죽음으로부터 깨워 내려 하면서도 아기는 알고 있는 것이었다. 또 한 아이는 죽은 엄마의 발치에 우울한 모습으로 무감각하게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사과를 주어 주의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이들의 천진한 슬픔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전쟁의 잊을 수 없는 의미를 상기시키며 우리 모두를 못 견디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의무대 트럭이 도착하여 사병 하나가 두 아이를 안아 고아(孤兒)로서 그들 인생의 첫 발길을 떼어주었고 여인은 혼자 도랑 속에 남아 있었다.
* ‘남찬잔’은 황해도 평산군 남천읍을 말하는 것 같다. 본문 중에 나오는 ‘흥소리’는 남천에서 경의선을 따라 60km 가량 서북방에 있는 서흥군 홍수리를 말하는 것 같다.
◎ 존 캐리 편저, 김기협 해설ㆍ옮김, ≪역사의 원전≫, 바다출판사, 2021
☞ 존 캐리John Carey 영어학자/영문학자
옥스퍼드 대학교 명예교수. 비평가, 도서 평론가, 방송인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맨부커상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지식의 원전(The Faber book of Science)」, 「역사의 원전(The Faber Book of Reportage)」 등을 엮었고, 지은 책으로 「필독 실낙원(The Essential Paradise Lost)」과 「예술의 효용(What Good are the Arts?)」, 존 던과 에밀리 디킨슨 연구서, 윌리엄 골딩의 전기가 있다. 회고록 「뜻밖의 교수(Unexpected Professor)」는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으며, 최근에는 「100명의 시인들(100 Poets)」을 집필했다.
다.
☞ 김기협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사학과에서 동양사 공부를 시작해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그리고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지냈다. 박사학위 이후 전문연구에서 벗어나 문명사의 흐름을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으며, 최근엔 중국 연변에 거주하며 한국사, 중국사, 한중관계사 정리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저서로 《미국인의 짐》 역서로 《중국도량형도집》 《바보만들기》 《가이아》 《반란의 천사들》(공역) 《용비어천가》(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