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 2025 광산구 인생자서전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최정시화 외
- [보도자료]
- 2025-12-01
- 2025 광산구 인생자서전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최정시화 외
14인의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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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시화 김희문 문영미 김영윤 이행숙 유수상
노양섭 이정옥 장식 배정배 박경희 백선희 배선주 소정호
“기록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역사 쓰기이다. 기록되지 않은 삶은 존재하지 않은 삶이다. 기록하면서, 이왕이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쓰자. 다사다난했던 삶에서 전달할 가치 있는 체험을 뽑아 기록하자. 이것이 문학이다.”
“자서전 쓰기는 삶을 정리하는 활동이자, 동시에 또 다른 삶을 찾아가는 활동이다. 자서전 쓰기는 제2의 삶을 여는 시작이다.”
|프롤로그
나는 배운다 - 이웃의 자서전에서 몰랐던 삶을 배운다
결핍은 고통을 수반한다. 시련과 역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두 갈래의 삶이 나뉜다. 시련에 굴복하는 자에겐 졸렬한 삶이 기다리고 있고, 시련을 이겨내고 일어서는 자에겐 볼만한 삶이 펼쳐진다. 그래서 할 이야기가 있다. 자서전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이 모임에 참여한 분들이 그렇다. 결핍은 도전을 낳고, 도전은 성취를 낳으며, 성취는 마침내 문학을 낳는다.
좀체 글이 오지 않았다. 기다렸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야 글들이 들어왔다. 비가 온 후 쑥쑥 솟아나는 죽순처럼 말이다.
1. 최정시화
처음엔 서성였다. 과연 그녀가 한 편의 자서전을 쓸 수 있을까, 자신의 힘을 믿지 못했다. 포기할까도 생각했으리라…. “아직 40대 후반의 나이인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쩐지 쑥스럽다. 첫 수업 날, 가야 할까 말까 수없이 망설였고, 결국 무겁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았다.”
“내 삶에는 서사가 없다. 그저 평범하다. 불안정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최정시화는 고백했다. 이어지는 그녀의 고백은 예사롭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것은 희생을 품는 마음이라고 배웠다.”
그녀의 결핍은 IMF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부모님의 사업이 망했다. “3~4학년 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납부금, 급식비를 못 내는 일이 잦았다. 창피했다. 빚쟁이가 쳐들어왔다. 아직도 두렵고 무섭다. 누가 문을 두드리면 두려움이 앞선다. IMF를 맞이하여 회사는 최종부도를 맞이하였다. 가라앉던 배가 침몰하였다.”
그 후 최정시화는 전전걸걸하였다. 이사를 다녔다.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 다녔다. 살얼음을 걷었다. 그러니까 사춘기를 겪으면서 최정시화는 결핍과 가난이 주는 우울한 그림자에 갇혀 살았다. 그래서 봄이 되면 목련을 기다렸다. 끝이 보이지 않은 우울한 삶, 희망이 보이지 않는 우울한 삶의 작은 위로였다. 그녀는 누추한 것을 싫어했다. 아니 피해 다녔다. 지는 목련을 피해서 지나갔다.
어엿한 건축설계사가 되었다. 사춘기에 형성된 자아는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했고, 누추한 것, 늙은 것, 초라한 것은 피하였다. 목련의 지는 모습, 짓이겨진 목련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성장기에 겪었던 결핍과 그 누추함을 누구에게 들킬까 봐서였다. 항상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그 누추함도 나이고, 내 가족이고, 내 인생이라는 것을 인제는 조금씩 받아들이고 싶다.”고 고백하는 최정시화는 이제 성숙한 여인이다. “후배의 죽음도 아픈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아리게 하고 힘들었던 것은 엄마의 죽음이었다.” 사실인즉 최정시화는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녀는 엄마와 화해한다. 엄마도 어렸고 두려웠고 힘들었을 것이다. 자서전을 쓰면서 엄마의 인생을 이해한다. 엄마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정용순….
2. 김희문
김희문의 삶은 교육에서 시작한다. 교육계에 몸담은 선친의 일을 계승하였다. 중학교 3학년 무렵, 김희문은 교사라는 직업에 마음이 끌렸다. 이양묵 선생은 ‘사람됨’을 강조하였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을 자주 하였다. 김희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운동장에는 차가운 혹한의 바람이 불었다. 김희문은 하늘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불을 밝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다짐은 훗날 김희문이 교단에 서는 계기가 되었고, 인생의 길이 되었다. 김희문의 삶은 후배 교사들의 전범이다. 교육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청년 시절, 야영지에서 비박하던 때의 수기가 참 좋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밤이 깊어지면 계곡 위로 별빛이 이불처럼 내려앉았다. 새벽이 오면 물안개가 산자락을 감싸며 피어올랐고, 그 신비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의 근심을 잊곤 했다.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하늘의 별빛을 바라보았다.
이후 2009년부터 2016년까지는 교무부장, 2017년에는 학생부장으로서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를 아우르는 역할을 맡았다. 교사로서, 또 행정가로서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학생을 중심에 두는 교육철학을 지켜왔다. 그는 다짐한다. “덕을 베풀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탬이 되자.”
3. 문영미
문영미의 글은 유려하다. 이렇게 시작한다. “목포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저 멀리 뱃고동 소리와 함께 갯바람이 골목을 스쳤다. 갈매기들이 푸른 바다 위를 날며 선창 앞바다를 맴돌던 그날, 유달산 아래 유달동의 아침에 해가 천천히 떠올랐다. 그 새벽빛 속에서 엄마는 나를 품에 안았다. 문영미가 태어났다.”
문영미는 작가의 소질이 풍부하다. 그녀는 회고한다. “나는 예쁨을 받고 자라난 고명딸이었다. 엄마 품에 안겨 들었던 자장가,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 그리고 가족의 저녁 식탁은 내 어린 날의 가장 찬란한 풍경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가 장에 다녀오시며 손에 들고 오던 달콤한 콩 국물의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가족의 향기로 피어난다.”
아쉬운 것은 미완성으로 글이 끝나고 있다는 데 있다. 어차피 인생이 미완성이 아니던가. “계절마다 나무들은 제 몫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봄이면 새잎이 돋고, 여름이면 매미 소리와 함께 푸르름이 짙어졌다. 가을이면 나뭇가지마다 익은 대추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마치 우리 가족의 웃음처럼 반짝였다. 겨울엔 장독대에 눈이 소복이 쌓여, 마당이 고요한 흰빛으로 물들었다.”
4. 김영윤
김영윤의 어린 시절은 한 편의 동화이다. 봄철에는 온 들녘의 나무와 풀잎에서 새잎이 파릇파릇 돋아났다. 피어나는 이름 모를 수많은 들꽃을 보면서 아침이슬 맺힌 샛길을 걸어서 등교했다. 여름철에는 물안개 곱게 피어오르는 논두렁 사이에서 ‘뜸북뜸북’ 울려 퍼지는 뜸부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등교했다. 가을철에는 황금빛으로 물든 드넓은 들판과 풍성하게 결실을 맺은 갖가지 과일이나 농산물들을 맛있게 먹었다. 겨울철에는 산골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풍 바람과 힘겹게 싸우면서 등하굣길을 걸었다.
그런데 남들 다 가는 중학교를 들어가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동네를 바라보고 있으면 친구들은 깔끔한 교복 차림에 책가방을 등에 메고 학교를 등교하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과 괴로움이 김영윤을 엄습했다. 눈물을 머금고 이겨내야만 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해야겠다고 두 손을 불끈 쥐면서 다짐했다.
날마다 독서실에서 책과 싸웠다. 전라남도 지방공무원 임용시험이 공고되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최종합격자 발표 명단에 응시번호 228, 김영윤이 새겨져 있었다. 김영윤의 인생사에서 가장 큰 결실을 거두는 성과였다. 감개무량하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5. 이행숙
이행숙의 자서전은 기이한 일의 연속이다. 다섯 살 때 걷지를 못했다. 무당기가 있는 봉사 할머니께서 조언을 주었다. 마루 밑을 파면 항아리 조각이 나올 것이다. 항아리 조각을 물에 끓여 마시라. 그러면 걸을 것이다. 인생사엔 합리적 이성으로 풀이되지 않는 일이 가끔 있다. 우연이 하는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1984년 10월 2일 저녁 8시경 월산초등학교 앞에서 일어난 사건은 행숙이의 인생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세 학생을 지도하고 오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가 천장에 묶여 있어 대소변을 다 받아내었다. 수술대 위에 37번 올라갔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졌다.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공부하면서 인생을 마치고 싶었다. 철의 여인, 이행숙은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90년, 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입학하였다. 이어 교육과, 보건학과, 법학과, 유아교육과, 청소년교육과에 등록하였다. 장한 여인, 그녀의 삶은 입지전이다. 그녀는 설파한다.
“사랑으로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다.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은 없고,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으며, 사랑이 건널 수 없는 바다도 없다.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다.”
6. 유수상
유수상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다이다. 1955년 신안군의 용소리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해에 용소초등학교에 입학한 몇 개월 후 무안군의 일로초등학교에 전학하게 되었다. 다시 초등학교 3학년 되는 해, 신안군의 비금중앙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13세에 목포의 유달중학교에 다녔다. 자취하였다. 이틀에 한 번 등교하기 전에 물을 받아야 했다. 유수상에겐 여인이 있었다. 선희였다. 어렸을 때엔 대화가 없었던 선희, 제법 아름다운 처녀로 변해 있었다.
7. 배선주
배선주, 그녀는 무용수이다. “비엔나는 춤 춘다”(Wien is dancing)는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그녀는 춤추는 예술가(dancing artist)이다. 늦깍이로 시작한 무용의 길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그녀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았다. 이름 없는 여인으로 살았다. 그녀의 자서전은, 자서전의 의의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름 없는 삶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선주야, 너는 지금 정말 잘 살고 있니?” 어느 날 문득 운전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음 한구석에 가득 차 있던 공허함을 느끼며,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지나온 삶의 길을 되짚어보았다.
“선주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니?” 돌이켜보니 너무 많은 시간 동안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살았다. 어린 시절의 꿈은 머릿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저 하루하루의 생계를 챙기고,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을 챙기며 살아갔다. 문득, 내가 정말 나답게 살아가고 있던 걸까? 내 삶에서 나만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질문들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 무용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던 그녀가 꿈을 향해 한 발짝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다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회고도 재미가 있다. 그녀는 회고한다. 시골에서는 항렬이 절대적인 질서였다. 누군가를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지, 어떤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어떤 순간에 입을 열고 닫아야 하는지까지 모두 항렬로 정해졌다. 그 체계 안에서 사람 사이의 도리와 태도, 겸손과 절도를 배웠다. 그 가르침을 ‘조백 교육’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책으로 배울 수 없는 삶의 법칙이자,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가치였다.
그녀를 키운 것은 현모양처의 상이었다. 할아버지가 그 뜻을 설명해 주었다. 한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할아버지의 손가락을 따라가듯 종이에 하나하나 써 내려갔다. ‘현, 모, 양, 처.’ 그렇게 쓰면서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 좋은 딸….
배선주, 그녀는 두 가지의 가치를 이루었다. 하나는 전통의 가치이다. 현모양처를 꿈꾸었고, 그 꿈을 이루었다. 게다가 말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무용수의 길을 걸으면서 자아실현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가치를 이루었다. 그녀의 끼는 남다르다. 북송 시대의 소동파를 팔방미인이라고 칭송하는데, 21세기의 팔방미인은 배선주가 아닐까?
8. 노양섭
“징검다리 건너고 사다리 오르는 삶의 여정”이라는 표제도 심상지 않고, “可居海 노양섭”이라는 호(號)도 예사롭지 않았다. 전라도의 섬과 오지를 떠돌며 바친 교육의 열정은 부럽기만 하였다. 지금은 은퇴 후, 혼자살이를 준비하며, 밥도 하고 빨래도 제 손으로 하고 있다.
그가 자란 곳은 해뜨는 마을 일곡(日谷)이다. 마을 앞엔 실개천이 흘렀다. 어른들은 선비 가풍을 숭상하는 광산 노씨 집성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마을 중앙에는 회관 역할을 하는 일신재가 있어, 어른들이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였다. 부부가 마실에 나가고 들어올 때, 남자가 앞서면 여자가 그 뒤를 따라 걷는 조신한 풍습을 유풍으로 지켰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려고 문중의 산을 개간하였다. 아버지는 농사에는 젬병이어서 팔자에 없는 소 장사로 변신하여 생계를 돕고 학비를 보태었다.
노양섭이 완도군 노화면의 넙도초등학교에 첫 발령이 난 것은 1969년 9월 1일이었다. 여객선에 몸을 맡기고 바라본 바다는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정겨웠다. 살랑이는 바닷바람과 반짝거리는 푸른 물결은 유혹하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이후 장성 서산초등학교로 전출되었고, 없는 시간을 쪼개 야간 대학에 진학하였다.
1978년 해남 영명중학교로 발령받았다. 당시 교직은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교직을 떠나는 것이 자랑이었다. 노양섭은 다짐했다. “모든 사람이 교직을 떠나도 교육 현장을 지키겠다. 농촌 학생들을 위해 헌신하겠다. 교육을 통해 꿈과 자아실현을 이루겠다.” 이후 노양섭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행정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 다시 섬으로 갔다. 신안 안좌중학교로 갔다. 섬 생활이 익숙해지자 최서남단에 있는 가거도분교장으로 가고 싶었다. 정말이지 위대한 노양섭의 꿈이었다.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새벽닭이 울면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토의 최서남단에 있는 절해의 고도에 부임한 것이다. 주민들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으로 ‘가거도‘라 불렀다. 雅號를 ‘가히 머무르며 살 만 하다’는 ‘可居’, ‘可居海’로 부르기로 했다. 가거도(可居海)는 불가거도(不可居海)가 아닐까?
가거도 2년 근무를 마치고 담양 한재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2006년, 갑자기 곡성중학교 교장에 차출 전보되었다. 다시 해남교육지원청 교육과장으로 전출되었다.
이제는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와 아내 덕분에 차려 준 밥상에 길들어 편하게 살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내도 요리하기 힘들어한다. 혼자살이를 위해 밥상 차리고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 청소, 설거지, 빨래도 한다. 스님들은 설거지도 수행 과정이라고 했다. 노양섭, 그는 수행 중이다.
9. 이정옥
이정옥은 신비의 베일에 싸인 여인이다. 말을 아끼니 알 수가 없다. 이정옥이 베일을 벗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동화였고,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이다.
집 마당엔 추수한 볏단이 지붕까지 닿도록 쌓여 있었다. 주인집 꼬맹이들과 강아지와 함께 우리는 쌓인 볏단 주위를 빙빙 돌면서, 볏단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뒷마당엔 돼지우리가 있었다. 까만색 새끼 돼지를 키웠다. 쌀뜨물에 먹을 것을 섞어 먹이통에 넣어주면 돼지들은 꿀꿀거리며 잘도 먹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 주변 풀숲에는 뱀딸기가 열려 있었다. 뱀딸기 열매를 먹으려면 눈썹 하나 떼놓고 먹어야 한다나. 도랑에는 물방개가 있었다. 물방개의 까만 등은 윤기가 났다. 만지면 매끄러웠고, 손에 꽉 쥐면 빠져나오는 힘이 강했다. 어느 여름날 잠자리를 잡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실로 묶어놓고 모기장 안에 들여놓았다. 날아다니는 파리를 잡아주니 입을 놀리면서 맛있게 잘 먹었다. 날개는 투명하고 눈은 보석 같으며 햇빛 아래에서 날아다니는 모습은 발레리나의 군무처럼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이정옥은 아버지의 노후를 챙기느라 힘들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하면서 아버지는 혼자 아파트에 남았다. 원래 아버지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작년 3월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피가 안 멈춘다는 급작스런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가서 확인했다. 소변줄을 교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변이 줄줄 샜다. 소변이 방에 고여 있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벽에 머리를 콩콩 찧으며 머리가 아프다고 하였다. 두통약을 사서 갔다. 아버지가 요양원 입소한 뒤로 한가하다.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겠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갈 수 있도록 주변 정리도 좀 하면서 나의 인생 제2막을 채워가야겠다. 이제부터는 정말 하고 싶은 것에 열중하면서 언제든 시원하게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보자.
10. 장식
장식도 교사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은 오월에서 눈부셨다. 1980년 그는 광주서석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5·18이 일어났다. 휴교에 들어갔다. 시내로 나가 민주화운동 과정을 보게 되었고 현실과 다르게 보도하는 방송과 신문을 보면서 일기를 썼다. 서울의 방송국에 보내려고 편지도 써보았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라남도 광주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대한민국 학생입니다. 1980년 5월 18일 0시 정부에서는 계엄령을 또다시 발표하였습니다. 평화롭게, 빨리 정권이 교체되기를 고대했던 우리 전남 학생들은 계엄령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남대와 조선대 선배님들은 가두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경대원들은 최루탄을 쏘고, 페퍼포그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수부대를 광주시에 투하시켰습니다. 제가 시내에서 목격한 것을 글로 옮겨 보겠습니다.
광주시 중심부에 투하된 공수부대들은 학생들의 옷을 찢고 몽둥이로 구타했습니다. 학생들을 칼로 찌르고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청과 금남로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이 구타를 당하고 피를 흘렸습니다. 18일과 19일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일언반구도 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에서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죽어가고 있는 저희 학생들은 무슨 죄가 있는 것입니까? 학생들과 시민들은 흥분하였습니다. 인명 피해는 점점 늘어났고 시내에 있는 파출소가 부서지고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학생과 시민들, 무수한 숫자가 잡혀갔습니다. 문화방송이 20일 밤에 태워져 버렸습니다. 밤의 광주시는 타고 있는 건물 등으로 대낮같이 밝았습니다.
5월 21일 수요일은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광주시민이 거리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후에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학생들도 총을 들고 계엄군과 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이 우리의 생명을 빼앗는데, 당신들이 우리의 입장이라면 그대로 개죽음을 당하겠습니까?
이 울분의 편지를 받은 분들이여, 그대가 진정한 민주화를 원한다면 광주사태를 쓴 나의 이 보도를 뉴스 시간에 방송해주기 바랍니다. 이 나라에 서광이 비칠 때까지 투쟁합시다.
1980. 5. 21. 광주에서 JS. S고교.
진실로 당신이 민주열사라면 목숨을 내걸고 방송하십시오.(편지 끝)
11. 배정배
배정배는 “어린 날의 손짓, 그 기억을 열다”는 표제로 회고를 시작한다. 어린 시절, 냇가에서 물방개·개구리·미꾸라지를 잡고, 산골짜기 계곡에서는 가재를 잡으며 놀았다. 옥수수를 훔쳐 먹고, 맨손으로 고구마를 캐서 흙 묻은 채 풀잎에 슥슥 닦아 먹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2년여 동안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뒷산에서 나무를 하던 중 친구 영호가 교복 차림으로 재를 넘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반에서 꼴등하던 아이가 금빛 ‘中’ 자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오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2개월간 공부한 끝에 장흥남중학교에 응시해 합격했다. 중학교 시절엔 집에서 12km 되는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논두렁과 밭두렁, 신작로를 따라 두 시간씩 걸었고, 아침 이슬에 옷과 운동화가 젖어들었다. 악착같이 공부했다.
1973년 10월 30일 신문에 발표된 합격자명단에 배정배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한 달을 공부하여 국가직 공무원에 합격할 수 있었다. 다음 해 1974년 6월 10일에 김해교도소로 발령을 받았다.
2025년 12월 31일 교정직에서 명예퇴임을 하였다. 이후 인성교육 강사, 국비취업준비생 양성소강사, 한문강사, 아파트관리소장 일을 하면서 퇴직 이후 20여 년 동안 꾸준히 일을 하였다. 노양섭이 학교를 지킨 것처럼, 배정배는 교도소를 지켰다. 이제는 제2의 인생을 위한 꿈을 꿀 때이다. 인간은 꿈과 함께 세상에 온다.
12. 박경희
새해가 되면 해돋이를 구경 가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박경희는 자서전에서 그렇게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살았던 동네는 먼 들녘 너머로 양옆에 산이 있었다. 그 사이로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그런 곳이다. 일찍 일어나 대문을 열고 큰길가로 나가 해돋이는 밥 먹듯이 볼 수 있는 섬이었다.
해 뜨는 섬에서 자란 박경희, 섬마을에서 전학을 와서 자기소개하면서 급우들에게 자신의 꿈은 간호원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 꿈을 이루었다. 36년의 직장생활을 마친 후 이제 자서전을 쓸 기회가 주어졌다. 기억이 희미하기 전에 삶의 한 자락을 남겨보고자 한다.
우리 집 부엌 뒤에는 동네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마시는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포도나무는 여름이면 주렁주렁 열렸다. 물을 길어오는 동네 사람들이 따먹었다. 감나무며 살구나무며 빨갛고 익은 앵두나무며 과실수가 많은 우리 집은 계절에 맞게 열매를 맺어 동네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녀의 오월은 이렇다. “5월 26일로 기억된다. 새벽에 헬리콥터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고‘ 광주시민 함께 해야 합니다’하는 목소리와 총소리도 들렸다. 우린 무섭고 총알이라도 날아올까 봐 솜이불을 덮고 온 가족이 안방에 엎드려 있었다. 따발총 소리와 함께 적막이 흘렀다. 그 일이 있고 한참 후에 엄마는 윗 골목 고려대 국문과 다니던 언니와 학교 근처 세탁소 아저씨네 막내아들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 당시의 광주 사람 대부분은 그 일로 인해 지금까지 아픈 가슴을 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산다.”
박경희는 간호사가 되었고, 수간호사가 되었다. 간호사의 꿈을 이루었다. 중환자실에서 14년을 근무했다. 박경희는 기도한다.
느리게 사는 삶도
듣지 아니하는 삶도
보지 않고 사는 삶도 좋을 것 같다.
누군가와 두 손 잡고 다니는 삶도
나 혼자 즐길 줄 아는 삶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삶은 더 좋다.
다들 덜 안타까워하는 시기에 가는 삶
눈 감을 때 옆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주며 애썼다 고생했다 한마디 해 주는 삶.
13. 백선희
무슨 영문인지 쓰는 것을 힘들어했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의 꿈을 키운 그녀가 자서전 쓰기를 힘들어했다. 무슨 까닭인가 알고 싶어 차 한 잔 나누며 대화하자고 제안했다. 예쁜 모자를 쓰고 나왔다. 나는 미술학도가 미술작업을 그만두게 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동양화를 선택할 걸, 그녀는 후회하였다. 조소과를 선택한 것이 오산이었다. 조소과는 말이 예술이지, 노동이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노예들이 담당하던 일이 조소였다. 나무를 깎고, 돌을 쪼고, 쇠를 용접하는 것은 중노동이다.
그래서 대학 졸업장 한 장 쥐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후 백선희는 어머니의 주선으로 한 남자를 만났고, 슬하에 아이를 낳았다. 남편은 부도를 냈고, 지금은 슬픈 노후를 보내고 있다.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은 그녀가 영혼의 안식을 찾는 곳은 절이란다. 그녀는 주 5일, 약사사에 오른다.
14. 소정호
“서두른다고 되는 일은 아니기에 최대한 차분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원고가 마감되었다. 중학 시절, 집안의 평화를 위해 지혜를 발휘한다. 중년에 들어 첨단의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2025년 11월 16일
황광우
◎ 최정시화 외, 사)인문연구원동고송 편,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큐디자인, 2025(비매품)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책자는 RISE사업컨소시엄 공동프로그램으로 광산구와 광주보건대학교가 함께 합니다.
광산구와 광주보건대학교는 이 사업을 통해 광주시민의 인문소양을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교육, 편집 및 책자 발행은 사)인문연구원동고송의 황광우, 유미정, 김동민 작가가 담당하였습니다.
☞사)인문연구원동고송
사)인문연구원동고송(冬孤松)은 ‘겨울산에 우뚝 선 소나무’처럼 시류에 흔들림 없이 오월정신을 잇고, 이웃을 보살피며 약자와 연대하는 실천의 길을 걷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