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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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선집-≪길 위의 노래≫─정길수 편역- [보도자료]
- 2025-06-15
김시습 선집-≪길 위의 노래≫─정길수 편역
간행사 박희병
이 총서는 좋은 선집을 만드는 데 큰 힘을 쏟고자 한다. 고전의 현대화는 결국 빼어난 선집을 엮는 일이 관건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이 총서는 지난 20세기에 마련된 한국 고전의 레퍼토리를 답습하지 않고, 21세기적 전망에서 한국의 고전을 새롭게 재구축하는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책 머리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다. 매월당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고전 작가 중 한 분이지만, 실상 ≪금오신화(金鰲新話)≫ 외에는 잘 알려진 작품이 없다. 물론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30대에 심혈을 기울여 지은 작품이고, 우리 소설사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걸작이다. 그러나 매월동의 진면목은 소설뿐 아니라 매월당이 지은 당대 최고 수준의 시(詩)와 문(文)까지 아울러 살필 때 좀 더 뚜렷이 드러난다. 조선시대 일급 비평가의 한 사람이었던 허균(許筠)이 거듭 칭송했던 대로 드높은 초탈(超脫)의 경지에 올라 있는가 하면 치열한 애민사상(愛民思想)을 담고 있기도 하다. 매월당의 문은 정치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굵직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근원적인 물음과 진지한 모색 과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詩
내 말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내 말 크게 어리석어 뵈지만
씹어 보면 맛이 있네.
나를 꾸짖음도 이 때문이요
나를 기림도 이 때문이지.
그만두자, 더 말할 것 없네
종이도 다 했으니 이제 그만.
나는 누구인가
이하(李夏)*를 내려다볼 만큼
조선 최고라고들 했지.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어찌 네게 걸맞을까?
네 몸은 지극히 작고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저 개울창이리라.
* 이하(李夏, 790~816), 당(唐)나라의 천재 시인으로 27세에 요절했다.
밤에 부르는 노래
푸른 산 초가집 안
백발이 근심과 함께하네.
남들과 만나서는 항상 말없이
눈물 훔치며 아무 이룬 일 없음을 한탄하네.
장대하던 뜻은 해마다 줄어들고
나이만 들어 날마다 시들어 가네.
물어보자, 지금 세상에
나처럼 이룬 것 없는 이 몇이나 될까?
늙는 건 싫지 않다만
헛되이 사는 건 정말 부끄럽군.
공자(孔子)는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했고
굴원(屈原)은 옛날의 현인(賢人)을 본받는다 했지.
한세상 근심 없이 살았지만
어떻게 죽느냐 이게 근심이라오.
세상 소식 어두운 채로 내 나이 오십
그만두자, 누구를 탓할까.
환한 달이 세상 모든 산 비추는데
오늘밤 내 마음 휑하기만 하네.
한번 눈 들어 보고 도로 눕자니
구름에 가리었다 다시 밝아지네.
세상사 흥했다간 또 망하고
달은 이지러졌다 또 둥그러지네.
고금의 일 모두 이와 같나니
뜬구름 같은 인생에 한숨지을 따름이네.
길 위의 노래 詩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온종일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가노라니
산 하나 넘고 나면 또 산 하나 푸르네.
마음에 집착 없거늘 어찌 육체의 종이 되며
도는 본래 이름할 수 없거늘 어찌 이름을 붙이리.
간밤의 안개 촉촉한데 산새들은 지저귀고
봄바람 살랑이니 들꽃이 환하네.
지팡이 짚고 돌아가는 길 일천 봉우리 고요하고
푸른 절벽에 어지런 안개 느지막이 개네.
* 김시습이 전라도 순천 조계산(曹溪山)에 있는 송광사(松廣寺)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승려 준(峻)에게 준 시이다. 산 하나 넘으면 또 산 하나, 가도 가도 끝없는 외로운 방랑길이지만 정다운 정취가 있다. 당대 제일의 비평적 감식안을 갖고 있던 허균(許筠)은 이 시를 두고 “진여(眞如)를 깨닫는 경지”라고 평한 바 있다.
춘천 가는 길
관동 땅에 첫눈 날리니
춘성(春城)의 나무엔 잎이 드무네.
가을 깊은 마을엔 술이 있는데
나그네 길 오래니 밥상에 고기가 없네.
산이 멀어 하늘은 들판에 드리웠고
강이 멀어 땅은 허공에 닿았네.
외기러기 저문 해 너머 날아가는데
먼 길 온 말은 앞길을 주저하네.
* 1483년경 관동 유람 중에 지은 시이다.
하늘에 묻는다 詩
어지러운 세상
어지러운 세상 변고도 많아
서글피 내 맘 상하게 하네.
아침엔 승냥이 두렵고
저녁엔 가시나무 숲 피해야 하지.
이러구러 해는 지고
바야흐로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네.
사나이 대장부
어이 포부를 펴지 못하나?
인생이란 숫돌과 같아
때가 되면 모두 닳고 마는 법.
세상에 나고 들기를 삼가야 할 터
큰 뜻을 품으면 마침내 때를 만나리.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책이나 지어 후세의 전하리.
옛사람 글 읽을 적에는
옛사람의 글을 읽을 적에는
먼 옛날 일이라고 생각지 마라.
이치를 따지는 말 내 스승 삼고
세상 보는 법을 옳게 배울 일.
천 년이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눈앞에 마주 앉아 얼굴 맞댄 듯.
캐묻고 따질 일 생각나거든
그때마다 문답 벌여 의심 풀게나.
한 구절 반 구절 기억한다면
있는 힘껏 실천하며 길 좇아야지.
꼼꼼한 공부가 가장 좋으니
밝은 길은 너를 속이지 않네.
* 김시습이 고전을 읽는 방법이다. 고전과 나 사이에는 시공간의 장벽이 없다. 천 년 전의 지성과 홀로 마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서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할까 文
군자의 처신
군자(君子)의 처신은 참으로 어렵다. 이익을 보고 조급하게 나아가서도 안 되고, 위태로움을 알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쌀을 씻다가 건져서 급히 간다”라는 것은 억지로 빨리 하는 것이 아니요, “천천히 내 길을 가련다”라는 것은 억지로 느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현의 진퇴(進退)는 오직 자신의 행동이 의리에 합당한지, 시기에 알맞은지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중략)
주역(周易)에 이런 말이 있다.
“나타난 용이 밭에 있다.”(≪주역≫ <건괘>에 나오는 말)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공자(孔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으로 나간다.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 성인(聖人)이 일어나면 세상 만물이 모두 그를 우러른다.”
이 말은 뜻을 펼치기에 알맞은 시기를 만났음을 의미한다.
사호(四皓, 중국 진시황 때 난리를 피하여 산시성 상산商山에 들어가서 숨은 네 사람)가 진나라를 피해 숨고, 도연명(陶淵明)이 송(宋)나라의 신하 노릇하지 않은 것은 모두 그들 자신과 세상이 맞지 않아서였다.
백이(伯夷)가 주나라를 떠난 일을 두고 사람들은 성인 중에서도 맑은 분이라고 분이라 했다. 유하혜(柳下惠)가 노(魯)나라에 벼슬한 일을 두고 사람들은 성인 중에서도 모나지 않는 분이라 했다. 이윤(伊尹)이 은나라로 간 일을 두고 사람들은 성인 중에서도 천하의 일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여긴 분이라 했다. 이 세 사람을 성인으로 받드는 이유는 모두 같다
반면에 진(秦)나라에 벼슬한 이사(李斯, 진시황 때의 승상)와 신(新)나라에 벼슬한 양웅(揚雄)은 진퇴의 모양이 비록 다른 것 같지만, 이익을 얻고자 의리를 저버린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이 때문에 선비는 진퇴를 결정하기에 앞서 반드시 나의 진퇴가 의리에 부합하는지, 나의 진퇴로 말미암아 도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벼슬에서 물러났다 해서 현명한 것도, 벼슬에 나갔다 해서 의심스러운 것도 아니요, 은거한다 해서 고상한 것도, 세상에 나와 이름을 떨쳤다고 해서 구차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벼슬해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났기에 미자(微子, 은나라 주왕의 이복형)가 은나라 주왕(紂王)을 떠난 것을 두고 은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마땅히 벼슬에 나가야 할 때 나갔기에 이윤과 부열이 은나라에서 벼슬한 것을 두고 그들 자신의 뜻을 꺾었다고 말할 수 없다.
마땅히 은거해야 할 때 은거했으므로 백이(伯夷)와 숙제(叔弟)가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한 것을 두고 고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땅히 세상에 나와야 할 때 나왔으므로 강태공(姜太公)이 세상에 나와 이름을 떨친 것을 두고 구차하다고 말할 수 없다
≪주역≫ <고괘(蠱卦)>의 ‘상구(上九)’에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건괘(乾卦)의 ‘구이(九二)’에는 “대인(大人)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모두 시기에 알맞게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략)
인민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인민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경고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라고 했다.
무릇 인민이 군주를 추대하여 군주에게 의지하여 살아간다 할지라도 군주가 왕위에 올라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인민뿐이다. 민심이 군주를 따른다면 가히 만세의 군주가 될 수 있지만, 민심이 이반하면 하루아침에 필부가 되고 만다. 군주와 필부 사이는 터럭 하나 차이일 뿐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군주의 창고는 인민의 몸이요, 군주가 입고 신는 옷이며 신발은 인민의 가죽이요, 군주가 먹고 마시는 술이며 음식은 인민의 기름이요, 군주가 사는 궁궐과 타고 다니는 수레며 말은 인민의 힘이요, 군주가 쓰는 온갖 물건들은 인민의 피다.
인민이 자기 생산물에서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이유는 군주가 총명함을 발휘하여 자신들을 잘 다스려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음식상을 받으면 인민이 자기처럼 잘 먹고 있는지, 옷을 입으면 인민도 자기처럼 잘 입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궁궐 안에 있을 때는 만백성이 편안히 지내고 있는지, 수레를 타고 나가서는 만백성이 평화롭고 경사로운지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네가 입는 옷과 네가 먹는 음식은 인민의 고혈(膏血)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하여 군주는 평생 평소에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미안하고 가엾은 마음이 드는 법이다. 그러거늘 어찌 망령되이 무익한 일을 일으켜 인민의 힘을 허비하고, 농사지을 때를 빼앗아 원망과 한숨을 사며, 평화로운 기운을 상하여 하늘의 재앙을 부르고, 기근에 몰려 인자한 부모와 효성스러운 자식이 생계를 잊지 못해 뿔뿔이 흩어져 살게 하며 끝내 도랑과 골짜기에 시체로 뒹굴게 한단 말인가?
아아! 옛날 좋았던 시절엔 군주와 인민이 한 몸이라서 군주의 힘을 알지 못했다. 그 시절을 일러 이런 노래가 있다.
우리가 먹고사는 건
모두 군주의 법도 덕분.
어느새 나도 몰래
군주의 법을 따르게 되네.*
* 요순(堯舜)시절에 인민들이 불렀다는 강구요(康衢謠)의 노랫말.
이를 두고 또 이렇게 노래한다.
해 뜨면 일하고
해지면 쉬나니 임금의 힘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 요순(堯舜)시절에 인민들이 불렀다는 격양가(擊壤歌)의 노랫말.
그러나 시대가 내려와 폭군이 교만하고 사납게 굴자 인민의 원망과 한숨이 일어났다. 이를 일러 이렇게 노래했다.
인민을 대하는 일이
썩은 고삐로
여섯 마리 말을 모는 것과 같네.
원망이 어찌 밝은 데 있으리
발현하기 전에 도모해야 하리라.*
* ≪서경(書經)≫ <하서(夏書)>에 나오는 말.
이를 두고 또 이런 말이 있다.
저 태양은 언제나 망할까?
내가 너와 함께 망하리라.*
* ≪서경≫ <탕서(湯誓)>에 나오는 말.
심지어 어떤 군주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 밤낮으로 놀더니만, 추운 겨울날 아침에 물을 건너가는 사람을 보고는 추위를 견디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그 정강이를 베어 보았고, 급기야는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라 보기에 이르렀다(은殷나라 폭군 주왕紂王이 벌인 일). 그러고도 그는 “포악한 행동이 해로울 게 없다”라고 말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강대국이 약속을 집어삼키며 정복 전쟁의 재앙이 거듭 일어나 무고한 인민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으니 너무도 참혹했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 이래로는 도사(道士)와 노자(老子), 석가(釋迦)의 말이 날로 번성하여 궁궐에서 지내는 제사에서 돈을 허비하니 인민의 괴로움을 어찌할까.
인민의 생업은 나날이 망해 가면서 가난한 동네 사람들은 생계를 유지할 길이 없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앞다투어 도망가 정체를 감추어 숨어 사는 것을 편안하게 여겼다. 이 지경에 이르고서야 군주가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오로지 인민을 사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인민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어진 정치〔인정(仁政)〕’를 펴는 것이 있을 뿐이다. (하략)
금오신화(金鰲新話) 小說
만복사에서 부처님과 내기하다
남원(南原)에 양생(梁生, 양씨 성을 가진 선비)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아직 미혼인 채 만복사(萬福寺) 동쪽에서 홀로 살았다. 방 밖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바야흐로 봄을 맞아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이 마치 옥나무에 은이 매달린 듯하였다. 양생은 달이 뜬 밤이면 배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낭랑한 소리로 이런 시를 읊조렸다.
쓸쓸히 한 그루 나무의 배꽃을 짝해
달 밝은 이 밤 그냥 보내다니 가련도 하지.
청춘에 홀로 외로이 창가에 누웠는데
어디서 들려오나 고운 님 피리 소리.
외로운 비취새 짝 없이 날고
짝 잃은 원앙새 맑은 강에 몸을 씻네.
내 인연 어딨을까 바둑알로 맞춰 보고
등불로 점을 치다 시름겨워 창에 기대네.
시를 다 읊고 나서 울고 나자 문득 공중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네가 좋은 배필을 얻고 싶구나. 그렇다면 근심할 것 없느니라.”
양생은 이 말을 듣고 내심 기뻐하였다.
이튿날은 3월 24일이었다 이날 만복사에서 연등회(燃燈會)를 열어 복을 빚는 것이 이 고을의 풍속이었다. 남녀가 운집하여 저마다 소원을 빌더니, 날이 저물자 염불 소리가 그치며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 그러자 양생은 소매에서 저포(樗蒲)를 꺼내 불상 앞에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오늘 부처님과 저포 놀이로 내기를 해 보렵니다. 제가 진다면 법회(法會)를 베풀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겠지만, 만약에 부처님이 진다면 미녀를 점지해 주시어 저의 소원을 이루도록 해 주세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고는 저포 놀이*를 시작하였다. 결과는 양생의 승리였다. 그러자 양생은 불상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말했다.
“승부가 이미 결정되었으니, 절대로 약속을 어기시면 안 됩니다.”
* 저포 놀이 : 윷놀이와 비슷한 놀이의 하나로, 저(樗 : 가죽나무)와 포(蒲 : 부들)의 열매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사위로 승부를 다투는 민속놀이.
그러고는 불상 앞에 놓인 탁자 밑에 숨어 부처님이 어떻게 약속을 지켜줄지 기다려 보았다.
이윽고 아리따운 여인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나이는 열다섯이나 열여섯쯤 되어 보였다. 머리를 곧게 땋아 내렸고 화장을 엷게 했는데 용모와 자태가 곱디고운 것이 마치 하늘의 선녀나 바다의 여신과도 같아 바라보고 있자니 위엄이 느껴졌다. 여인은 기름이 든 병을 들고 들어와 등잔에 기름을 부어 넣고 향로에 향을 꽂은 뒤 부처님 앞에 세 번 자라고 꿇어앉더니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운명이 어쩌면 이리도 기박할까!”
그러더니 품속에서 뭔가 글이 적힌 종이를 꺼내어 탁자 앞에 바쳤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하략)
◎ 정길수 편역, ≪길 위의 노래≫-김시습 선집, 2006
☞ 김시습
조선 초기 학자(세종 17∼성종 24). 생육신의 한 사람. 다섯 살 때 세종의 부름을 받고 시를 지어 신동이라 불렸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유ㆍ불ㆍ선 3교의 영역을 넘나든 사상가요 당대 정치의 폐해와 인민의 현실에 주목했던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출세의 길을 단념한 채 전국을 방랑하며 2천여 편의 시를 남겼고, 경주 금오산에 머물던 30대 시절에는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으며 ‘태극설, 십현담 요해’ 등 중요한 철학적 저작을 다수 저술했다. 시와 책을 쓰며 살다 부여 무량사에서 생을 마쳤다.
☞ 정길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구운몽 다시 읽기≫, ≪17세기 한국소설사≫, 역서 ≪구운몽≫, ≪선가귀감≫,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 허균 선집≫, 논문 「전쟁, 영웅, 이념」, 「한국한문소설의 여성 욕망」 등이 있다. 한국 고전소설과 한문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