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정길수 편역- [보도자료]
- 2024-11-26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정길수 편역
이 책은 허균이 남긴 시문을 선별하여 풍문 속에 가려진 허균의 삶을 짚어내고 있다. <잠 못 이룬 밤>, <요양의 달>, <아내>, <옛날과 지금>, <게으른 관리>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풀어내었다. 허균이라는 독특한 개인의 내면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허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간행사
○ 우리 고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비단 문학만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 예술과 사상을 망라한다.
○ 이 총서는 좋은 선집(選集)을 만드는 데 큰 힘을 쏟고자 한다. 고전의 현대화는 결국 빼어난 선집을 엮는 일이 관건이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 책머리에
○ 허균은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라고도 일컬어지고, 겉과 속이 다른 간신 소인배라고도 불린다. 자신의 정(情)을 개성적으로 표현하여 자기 시대의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한 혁신주의자로 평가되는가 하면, 과거의 문학 전통을 되살리고자 한 복고주의자의 자장 안에서 허균의 문학을 조명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처럼 허균은 사백 년 뒤의 독자에게까지 논란거리를 던져 주고 있는 문제적 인물이다.
○ 역자는 허균이 남긴 시문을 선별하여 풍문 속에 가려진 허균 삶의 섬세한 결을 한 권의 책 안에 담아 보고자 했다.
어디로 돌아갈까
백상루 1
누각은 하늘에 솟았고
아래는 장강(長江)
한가한 날에 병을 무릅쓰고
산에 올라 애오라지 머물렀네.
고개 들어 향로봉 보니
구름 위로 울긋불긋 떠 있어라.
밀랍 바른 신을 신고 정상에 올라 봐야 할 텐데.
신선 될 기약은 아득히 멀고
나그네 시름만 가만히 일어나네.
상념에 젖어 홀로 서성이는데
서편에 지는 해는 주렴에 걸렸네.
백 년도 못 사는 인생
외물(外物)에 얽매여 번민과 근심뿐.
명예도 이익도 부질없거늘
왜 빨리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이번에 나랏일 마치고 나면
벼슬 버리고 깊은 산으로 돌아가리라.
학을 탄 신선에게 묻노니
신선세계 가는 걸 허락해 주실는지.
* 1597년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사신 가는 길에 평안도 안주(安州)의 명승지인 백상루(百祥樓)에서 쓴 시이다. 백상루 아래로는 청천강이 흐르고 저 멀리 묘향산 향로봉이 보인다.
어디로 돌아갈까
오랜 나그넷길
송옥(宋玉)의 재주가 처량하구나.
부귀영화는 부질없는 꿈이건만
세상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네.
깊은 방에 등불꽃 웃네.
아득한 하늘엔 변방 기러기 서글프네.
강원도 옛집도 쇠락했으니
어디로 돌아갈까.
* ‘송옥(宋玉)’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대부(大夫)로 <고당부(高堂賦)>ㆍ<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 등의 유명한 부(賦)를 남겼다. ‘등불꽃’은 등잔불의 불똥이 꽃 모양을 이룬 것을 말한다.
∥인용자 주
登徒子好色賦(등도자호색부) 송옥(宋玉)
대부 등도자(登徒子)가 초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송옥(宋玉)을 헐뜯어 아뢰었다. “송옥의 사람됨은 몸과 얼굴은 곱고 잘생긴 데다, 언변이 뛰어나며, 성품이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입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그와 더불어 후궁에 출입하시지 마십시오.”
왕이 등도자의 말을 가지고 송옥에게 물으니, 송옥이 대답하였다. “저의 용모가 잘생긴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고 언변이 뛰어난 것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호색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신은 그런 적이 없습니다.”
왕이 말하길, “여색을 밝히지 않은데 그런 말이 있겠는가? 할 말이 있으면 머물고, 할 말이 없으면 물러가라.”
송옥이 말했다. “천하의 미인이라면 초나라를 따를 수 없고, 초나라의 미인이라면 신이 사는 동네를 따를 수 없습니다. 저의 동네 미인 중에서도 동쪽 집의 여자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동쪽 집 미인은 한 치를 보태면 너무 크고 한 치를 빼면 너무 작습니다. 분을 바르면 너무 희고 연지를 바르면 너무 붉습니다. 눈썹은 물총새 깃털과 같고 살갗은 백설과 같습니다. 허리는 비단을 묶은 듯하고, 치아는 오무린 조개 같습니다. 상긋한 미소로 한 번 웃으면, 양성 고을이 정신을 잃고 하채 고을이 혼미하게 됩니다. 그런 그녀가 담장 너머로 신을 삼 년이나 엿보았지만 이날까지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등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처는 쑥대머리에다 뻐드렁니가 입술 밖으로 나오고, 절름발이에 등은 굽었으며, 옴에다 치질까지 있습니다. 등도자는 그녀를 사랑하여 아들을 다섯이나 두었습니다. 왕께서는 과연 누가 호색한인지 살펴보십시오.”
설날
젊은 시절엔 이날이 반가워
가벼운 외투에 말 타고 벗들과 어울렸지.
스무 해 전 일 떠올리니
삼천리 밖 이내 신세 처량도 하군.
명예와 이익 모두 간밤의 꿈일 뿐
봄꽃 눈에 들어오니 새봄이 오나 보네.
이대로 떠나 산방(山房) 주인 되면 어떨까.
내 책 일만 권을 차례대로 꽂아 놓고.
* 허균이 48세 되던 1616년 설날 북경에서 쓴 시이다. 부질없는 명예와 이익 모두 버리고 산속에서 서실(書室)을 지어 1만 권 장서와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이 허균의 새해 소망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2년 남짓 출세 가도를 달리다 급작스레 처형되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읽고 또 읽으리라
손꼽아 보니 돌아갈 날 가까워
외로운 나그네 마음 누그려 보네.
책 읽어 긴긴 낮 보내며
남은 추위 매서워 문은 닫았네.
세상의 맛은 늘그막에 쓰고
사람의 마음은 마지막이 어렵지.
문학도 벼슬도 다 누리려다
한순간에 끝날 줄 그 누가 알까.
영예와 치욕, 슬픔과 기쁨
지나온 사십 년 돌아보네.
몸은 안락과 방종에 찌들어 나태해졌고
마음은 명예와 이욕에 쫄아들었군.
벼슬은 허깨비지만
문학이란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것.
어떡하면 만년에 내 마음 지킬까
옛사람의 책 읽고 또 읽으리라.
* 1616년 1월 북경에서 쓴 시이다.
내 마음 따라
그리운 아내
작년 이날 칠석에는 왜란 피하던 중
비단 포대기에 아들을 낳았었지.
아내의 죽음을 탄식하던 반악(潘岳)의 한을 뉘 알리
아들을 잃고 홀로 산 자하(子夏)의 슬픔마저 겹쳤네.
한 해 사이 달라진 세상에 마음 상하거늘
오늘도 내 병은 지루하게 남아 있네.
이 좋은 밤에 기쁜 마음 더욱 없어
직녀성을 보며 함께 눈물 흘리네.
* 반악(潘岳) : 진(晉)나라의 문인으로 자는 안인(安仁)이다. 반악 부부는 금슬 좋기로 유명했는데, 반악이 아내 양씨(楊氏)를 여의고 1주기 때 다시 관직에 복귀하며 서글픈 심정을 토로한 <도망시(悼亡詩)>가 유명하다.
∥인용자 주
悼亡詩(도망시) 아내 잃음을 비통해 하며 — 西晉(서진) 潘嶽(반악)
荏苒冬春謝 임염동춘사
寒暑忽流易 한서홀유역
之子歸窮泉 지자귀궁천
重壤永幽隔 중양영유격
세월 덧없이 흘러 겨울과 봄도 지나가고
추위와 더위도 홀연히 바뀌었다오.
당신이 황천으로 돌아가 버리니
겹겹의 땅은 우리를 영원히 갈라놓았구려.
望廬思其人 망려사기인
入室想所歷 입실상소력
幃屏無髣髴 유병무방불
翰墨有餘跡 한묵유여적
초막집 바라보며 당신을 그리워하고
방에 들어오니 함께한 지난날들이 떠오르는구려.
휘장과 병풍에는 당신의 모습 희미하여 없는데
쓰다 둔 편지에 당신의 자취가 남아 있다오.
流芳未及歇 유방미급알
遺掛猶在壁 유괘유재벽
悵怳如或存 창황여혹존
周惶忡驚惕 주황충경척
감도는 향내는 아직도 다함이 없고
남긴 그림도 아직 벽에 걸려 있다오.
얼떨떨한 마음에 혹 살아있나 하여
허둥대다 근심 속에 놀라며 두려워하였다오.
* 출처 : https://blog.naver.com/looh1938/223267093622
** 자하(子夏) : 공자(孔子)의 제자 복상(卜商)의 자. 만년에 아들을 잃고 슬픔이 지나쳐 실명한 뒤 세상과 떨어져 홀로 살았다고 한다.
*** 25세 때인 1593년 7월 7일에 쓴 시 12수 중 제 5수로, 피난 중에 세상을 뜬 아내 안동김씨의 1주기를 맞아 서글픈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내 삶을 살아가리니
밤에 불경 읽어
집착하는 마음은 없으나
아내도 있고 고기도 먹는다네.
출세의 푸른 꿈 이미 버렸거늘
탄핵이 빗발친들 무슨 근심 있겠나.
내 운명 편안히 여기나니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고픈 꿈은 여전하다오.
예교(禮敎)로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
부침을 오직 정(情)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삶을 살아가리니.
벗은 찾아와 위로하고 처자식은 마음이 안 좋구나.
그래도 얻은 게 있어 기쁘다오
이백과 두보처럼 이름을 나란히 했으니.
* 서방정토(西方淨土) : 속세의 모든 번뇌가 없는 부처의 청정 세계.
** 원제목은 <파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문파관작聞罷官作)>로, 삼척 부사로 부임한 지 두 달이 채 안 된 1607년 5월, 불교를 숭상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당한 뒤에 쓴 시이다.
늙는 건 괜찮지만
병든 봄으로 해마다 나그넷길
늙어 가며 눈서리만 수염에 가득하군.
몸 늙는 거야 아무 상관 없다만
눈 아파 책 보기 힘든 게 한스러워라.
* 1615년 11월 북경에서 쓴 시이다.
변혁의 길
군대에 대하여
지금 우리나라 땅은 고려 때에 비해 줄어들지 않았고 인구도 줄지 않았거늘, 겁을 먹고 벌벌 떨며 매번 군대 없는 것을 두려워하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의 군대에는 조정의 신하 및 재상의 아들, 국립학교의 유생들을 소속시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관청의 하인과 천민들은 모두 군적에서 이름을 빼기 위해 꾀를 부리고, 군대의 관리들은 군사들을 쥐어짜 제 욕심을 채우니 병사들의 골수까지 벌써 다 사라졌다. 평상시에 후한 대접을 해 주어도 변란이 닥쳤을 때 목숨을 걸라고 하면 혹 살기 위해 물러서고 달아나는 자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모질게 부리며 사지로 몰아간다면 그들이 흩어질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장수를 선발할 때는 반드시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를 써야 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군대를 다스리는 방법은 물론 다르다. 그러나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임금의 측근을 섬기는 일만 잘하는 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일단 장수가 되면 멍하니 손과 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몰라 허둥대다가 적이 멀리 보이기도 전에 미리부터 무너져 달아난다. 아아! 이런 장수들로 이런 군대를 거느리고 있으니, 군대가 없다고 해야 옳다. 나라가 나라 꼴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정말 우연일 뿐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
사명당
병술년(1586) 여름에 나는 중형(仲兄, 허봉許篈을 말한다)을 모시고 봉은사(奉恩寺) 아래에 배를 댔다. 한 승려가 날 듯이 와서 선창 앞에서 읍하는데, 풍채가 당당하고 용모가 단정했다. 앉아서 이야기해 보니 말은 간략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이 고원했다. 내가 이름을 묻자 “종봉(鐘峰)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몹시 훌륭한 분이라고 여겼다.
밤에 매당(梅堂)에서 묵는데, 스님이 자신의 시를 보여주었다. 음운이 청아하고 뜻도 맑았다.
중형은 “당나라 아홉 승려(송대에 만당풍의 시로 유명했던 아홉 승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군요”라고 극찬했다. (중략)
임진년(1592) 겨울에 나는 명주(溟州, 강릉)로 피난 가 있었다. 그때 스님이 의병을 규합하여 임금의 위태로움을 막아내고 그 스승(서산대사)을 대신해서 의병을 이끌고 여러 차례 왜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서 뛸 듯이 기뻤다. 그 뒤 스님은 왕명을 받아 적진에 들어가서 왜적을 타이르고 큰 공을 세웠다. 스님이 그리웠지만 다시 만날 길이 없어서 애가 탔다.
병신년(1596) 겨울 내가 승문원(承文院)에서 근무할 때 공무로 영의정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를 뵈러 갔더니, 높은 고깔모자를 쓰고 수염을 길게 기른 스님이 곁에 앉아 있었다. 스님은 내 손을 잡고 반가워하며 옛일을 이야기했다. 영의정 댁에서 나와 함께 여관으로 가서 당시의 긴요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받치는 의기로 손뼉을 치며 이해득실을 설파하는 모습에는 기개 높은 옛 협객의 풍모가 있었고, 안장에 기대 좌우를 돌아보며 적을 일소하는 듯 뜻을 둔 모습은 기세등등한 노장(老將)처럼 보였다. 나는 더욱 스님을 존경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스님의 시문(詩文)이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위태로운 나라를 구할 재주를 가지셨거늘, 불문(佛門)에 잘못 발을 담갔으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하략)
나를 가두지 마라
나의 운명
성옹이 누구기에
그 덕을 칭송하나.
그 덕이 뭔고 하니
지극히 어리석고 무식하단 것.
무식하기는 비루하다 할 만하고
어리석기는 용렬하다 하겠네.
비루하고도 용렬하니
자랑할 일 뭐 있을까.
비루하면 조급하지 않고
용렬하면 화내지 않지.
화내는 일도 없고 조급함도 없어
바보 같은 얼굴일세.
온 세상이 몰려가는 곳이라면
성옹은 가지 않지.
사람이 괴로이 여기는 일
성옹 홀로 좋아하네.
마음 편하고 정신이 깨끗한 건
용렬하고 비루한 데서 온 것.
정기가 모이고 기운이 온전한 건
어리석고 무식한 데서 온 것.
형벌을 당해도 두려워 않고
벼슬에서 쫓겨나도 슬퍼 않네.
비방을 하든 욕을 하든
언제나 희희낙락.
내 자신이 가리지 않으면
누가 너를 기려 주랴.
성옹은 누구인가
바로 나 허균이지.
* 원제목은 <성옹송(惺翁頌)>이다. 허균의 서재 이름이 ‘성소(惺所, 항상 깨어 있는 곳)’였으니 ‘성소에 사는 늙은이’ 혹은 ‘항상 깨어 있는 늙은이’라는 뜻의 ‘성옹’은 여기에서 온 호이다.
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
시는 어떻게 지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시는 어떠해야 지극한 경지에 나아갈 수 있는가?
먼저 흥취 있게 뜻을 세우고, 다음으로 격조 있게 말을 정하되 구절은 활력 있게, 글자는 원활하게, 음향은 밝게, 마디와 마디의 연결은 긴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소재를 취하여 짜 나가되 올바른 자리를 범해서는 안 되고 겉모습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두드리면 맑은소리를 울려야 하고, 다가서면 화려하게 빛나야 하며, 내려가면 끝 모를 심연이요 올라가면 하늘을 향해 뛰어올라야 한다. 닫으면 전아하고도 굳세고, 열면 호방하고 자유분방해야 하고, 풀어놓으면 생동하며 고무되어야 한다. 쇠를 달구어 금으로 만들고, 썩은 것을 변화시켜 신선하게 만들어야 한다. 평범하고 담박하되 얕고 속됨에 이르지 않고, 기이하고 예스럽되 괴벽에 이르지 않으며, 사물의 형상을 노래하되 사물과 비슷함에 구애되지 않고, 서사를 배치하되 음운과 율격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화려하고 꾸미되 이치를 손상시켜서는 안 되고, 펼치는 논리가 피상적이어서도 안 된다. 비(比)와 흥(興)이 깊으면 사물의 이치와 통하고, 용사(用事)가 교묘하면 자기가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격조가 한 편 전체에 나타나면 충만해서 깍아내릴 수 없고, 말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기운이 뿜어져 나오면 드넓어 굴복시킬 수 없다. 이상의 조건을 다 갖추고 나오면 진정한 시라고 할 수 있다.
* 용사(用事) : 전고(典故)나 유명 문학 작품의 표현을 끌어와 새로운 문맥에서 활용하는 일.
◎ 정길수 편역,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돌베개, 2012
☞ 정길수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구운몽 다시 읽기≫, ≪17세기 한국소설사≫, 역서 ≪구운몽≫, ≪선가귀감≫,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논문 <전쟁, 영웅, 이념>, <한국한문소설의 여성 욕망> 등이 있다. 한국 고전소설과 한문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