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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인들≫-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박석무 글, 황헌만 사진

  • 작성자김동민 이메일
  • 작성일2024-10-30 20:12
  • 조회540
  • [보도자료]
  • 2024-10-30

조선의 의인들-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박석무 글, 황헌만 사진

 

 

역사의 현장에서 진정한 조선의 선비정신을 만나다!

 

조선시대에 인의의 유교철학을 몸소 실천한 의인, 24명을 소개한조선의 의인들. 다산전문가로 잘 알려진, 저자 박석무가 우리 땅에서 살다 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삶의 족적과 사상을 역사현장과 연결 지어 그려낸다. 난세에 역량을 발휘해 그 어려움을 극복한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 번암 채제공 등의 정신과 사상을 살펴보고, 조선 성리학의 쌍벽인 퇴계와 율곡의 가르침도 알아본다. 이 밖에 도학자로 분류되는 하서 김인후, 창계 임영 등의 깊은 철학 등 조선의 의인들의 학문과 사상, 의혼과 애국심, 높은 인격과 뛰어난 문장과 시심, 경국제세의 탁월한 경륜들을 재해석하였다.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찾아서조선의 의인들책머리에 붙이는 말

 

나에게는 젊은 날부터 꿈이 있었다.

20대이던 60년대 후반, 전라도 장성의 고산서원을 찾았을 때, 우람한 담대헌에서 노사 기정진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리학을 강론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세상에서 잊혀져 가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70년대 초반, 고등학교 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수학여행으로 안동의 도산서원을 방문해서는 퇴계사상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땅에서 살다 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삶의 족적과 사상의 대강을 역사 현장과 연결 지어 글로 쓰고 싶다는 열망도 가졌다.

 

공자는 인(), 맹자는 인의(仁義)를 함께 높이면서 유교의 사상체계를 완성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스물네 분의 학자ㆍ정치가ㆍ문학가ㆍ순국열사는 조선시대에 인의의 유교철학을 몸소 실천한 위인들이다.

이분들은 인을 바탕으로 의라는 길을 걸었으니 바로 조선의 의인들이다.

책의 제목을 조선의 의인들이라고 붙였다.

 

 

 

1 살면 함께 살고 죽으면 함께 죽자

금남 최부, 해양문학의 최고봉 표해록을 쓰다

 

 

해양문학의 최고봉 표해록의 저자

 

최부 하면 유명한 표류기인 표해록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성종 19년인 1488년에 35세의 최부가 왕에게 바친 책으로, 저작된 지 80여 년 뒤인 1569년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에 의해 간행되었고 1578년에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가 당한 처절한 고난과 역경이 감동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대단히 유명해졌고, 일본이나 중국에서까지 번역되어 세계 제3대 여행기로 꼽히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헨드릭 하멜의) 하멜표류기와 함께 근대 이전에 기록된 세계적 여행기로 거론되는 것이다.

 

 

배 안에서는 생사고락을 같이해야 한다

 

망망대해의 풍파 속에서 난파 직전인 배 안에서 43명의 동승자들에게 했던 최부의 말을 들어보자.

 

배 안에서는 생사고락을 같이해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함께 탔더라도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하거늘 하물며 우리는 모두 한 나라 사람으로 정이 육친과 같음에랴. 살면 함께 살고 죽으면 함께 죽자.” 표해록 윤정월 10일조

 

최부는 직계 후손의 수가 적고 세력도 미약하다.

금남 최부의 고향마을에서 생가터를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표해록을 통해 세계화 정신을 일찍이 이 땅에 뿌렸고, 연산군의 폐정과 고관대작들의 비리를 폭로하다 갑자사화로 처형당했다.

그런 만큼 최부의 고향 나주는 그 외로운 의리 정신을 묻혀두어서는 안 된다.

최부의 정신은 이 땅의 사상적 유산으로 현양하기에 충분하니 지방자치단체가 나서서 알맹이 있는 사업을 해야 한다.

 

 

9 나라 있는 줄만 알고 제 몸 돌볼 줄은 몰랐다

한음 이덕형, 영원한 친구 오성과 더불어 국난을 극복하다

 

 

오성과 함께 국난을 극복한 학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오성 대감 백사 이항복과 항상 함께 생각되곤 한다.

그는 학자요 문인이자 정치 역량을 발휘했던 정치가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라는 일찍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국난을 당했을 때, 오성과 한음이라는 두 정치가의 충성심과 지혜로 망하기 직전 나라가 중흥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음은 오늘날까지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31세에 대제학에 오르다

 

임진왜란의 참상은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다.

나라는 사실상 망한 상태였고 인민의 고통과 시름은 형언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명나라 군대의 힘으로 평양성이 탈환되고 끝내 한양이 수복되어 임금이 서울로 돌아왔지만 죽음의 도시인 서울은 사람이 살아갈 곳이 아니었다.

서애 유성룡과 오리 이원익이 힘을 합해주고 백사와 한음이 손을 맞잡고 중흥의 길에 앞장섰기 때문에 그나마도 나라의 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혁혁한 한음의 공, 역사는 증명한다

 

실학자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은 한음이 세상을 떠나가고 150년 뒤에 태어난 한음의 7대 후손이다.

그와 막역하게 지냈던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정약용은 한음의 화상(畫像)에 바치는 찬양의 글을 지었다.

자신이 살던 곳과 가까운 수종사 아래에 살았던 한음이라서 더 가까운 마음으로 찬양사를 바쳤는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백성들은 노성한 선비로 우러렀네.

임금의 은총 가슴을 맡길 듯이 친숙했으나

벗들이야 포의한사(布衣寒士)처럼 가까이 여겼네.

유언비어가 몸을 죽일 듯했어도

임금은 마음의 본심을 꿰뚫어 알아주었네.

뼈를 깎는 무서운 상소를 올려도

어리석은 임금 광해도 내쫓지 못했네.

높은 충성심과 큰 절개가

모두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아무리 하늘과 귀신이 보살폈어도

누가 그에게 그런 복을 내렸으랴.

아름답다 풍성한 광대뼈에 윤기 나는 보조개

큰 체구에 근엄까지 갖추었으니

뒷세상의 사람들

그 누가 감히 공경하지 않을 건가. —「고 영의정 한음 이공 화상 찬

 

 

 

12 토지 공개념을 실시해 제도를 바로 세우자

조선의 실학을 개창한 반계 유형원

 

 

반계의 물줄기를 따라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우반동(愚磻洞)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변산반도를 형성한 변산(邊山)의 산자락을 따라 질펀한 평야가 널려 있고, 평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개천이 여럿 흐르고 있는데, 이 우반동의 가운데를 흐르는 냇물이 바로 반계(磻溪)라는 물줄기이다.

소란하고 시끄러운 서울과 떨어져 산이 아름답고 강이 푸른 우반동은 평야가 널려 있어 삶도 궁핍하지 않았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위다

 

평생을 마칠 계획으로 부안으로 낙향한 유형원은 도착하자 시 한 수를 읊는다.

 

세상 피해 남국으로 내려왔소.

바닷가 곁에서 몸소 농사지으려고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시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에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하며 살아야겠네.

 

 

지칠 줄 모르며 세상을 경륜하려는 뜻

 

이제는 정설로 자리 잡았지만 조선 실학의 1(一祖)는 반계 유형원이며 2조는 성호 이익, 3조는 다산 정약용이다.

반계의 반계수록으로부터 조선의 실학사상은 본모습을 보였고, 그 후의 실학자들은 대부분 반계의 경륜과 경세론, 경국제민(經國濟民)의 경제사상에서 영향받지 않을 수 없었다.

• ≪반계수록서문을 짓고 반계 유 선생 전이라는 전기를 지은 이익이 평생 동안 가장 존숭하고 사숙(私塾)했던 학자가 반계였다.

 

근세에 발견된 반계의 논문으로 정교(政敎)라는 짤막한 글이 있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공전(公田)제도와 공거(公擧)제도를 실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정치를 잘해도 헛된 일이 되고 만다.”

 

그는 통치 원리로는 토지를 공유하고, 인재 발탁의 방법으로는 공변된 천거제도를 활용할 것을 강조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토지의 공개념과 선거제도를 통한 인재의 등용이니 얼마나 탁월한 예언인가.

대단한 발상이었다.

 

토지의 공개념이 제대로 실행되면 모든 제도가 바르게 된다. 빈부가 저절로 균등해지고 분배가 저절로 확정되고 호구도 저절로 밝혀지고 군대도 저절로 정돈되니, 이렇게 한 뒤에라야만 백성을 교화하는 정책이 정해질 수 있다.”

 

 

 

18 언로를 열어 백성의 의견을 수렴하자

구한말 시대정신을 이끈 화서 이항로의 선비정신

 

 

청화정사에서 배출된 조선의 의인들

 

벽계 산림인 화서 이항로는 청화산(靑華山) 서쪽으로 10리 지점인 벽계수가 철철 흐르는 물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이 청화정사(靑華精舍)’이다.

화서 이항로가 태어난 청화정사는 아버지 때부터 기와집으로 덩실하게 세워졌다.

한말 의병운동과 척양척왜의 기본 논리인 주리척사(主理斥邪)의 시대정신이 싹튼 곳이다.

 

화서의 영향을 받아 일본을 물리치고 조선의 전통사상을 고수하자던 화서의 문하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이 그곳에서 배출되었다.

중암(重菴) 김평묵ㆍ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ㆍ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ㆍ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등은 위정척사운동의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모두 벽계리의 청화정사에서 배출된 조선의 마지막 의인들이었다.

 

 

아버지처럼 임금 사랑하고, 집안 걱정하듯 나라 생각하다

 

화서 이항로의 정치사상은 간략하고 명확했다.

기묘사화에 정암 조광조는 억울한 누명으로 사약을 받고 유배지 호남의 능주에서 죽으면서 유시(遺詩)를 짓는다.

그는 그 시에서 아버지처럼 임금을 사랑하고, 집안 걱정하듯 나라를 생각하다(愛君如愛父 愛國若憂家)”고 읊었는데, 화서 이항로는 언제나 그 시를 외우면서 정치 신념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청화정사의 주변에 맴돌고 있었기에, 화서의 문하에서 의병장 최익현이나 유인석과 같은 탁월한 애국자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공자는 나라가 위급한 상태임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見危授命)”, 맹자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捨生取義)”고 했는데, 화서는 생활철학에서 그런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다.

 

 

 

24 망국에 한 사람도 자결 않는다면 되겠는가

매천 황현. 지식인의 책무를 몸으로 실천하다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곳

 

뛰어난 시인이었던 매천은 역사가였다.

한말 최고의 역사책인 매천야록은 매천의 높은 사안(史眼)과 통찰력 때문에 최근세사 연구에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 역사책에는 황현 자신의 약전(略傳)이 실려 있다.

 

대한(大韓)은 망하고 전 진사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 죽다. 현의 자는 운경(雲卿), 그의 선대는 장수인이다. 임진왜란 때 충청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무진공 진()의 후손으로 호가 매천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슬기가 있었으며 노사 기정진을 찾아뵙자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주었다. 어른이 되자 서울로 올라가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등과 좋은 벗으로 사귀었다. 34세 때인 고종황제 무자(戊子)년에 진사가 되었다. 담론을 잘하고 기절(氣節)을 좋아했다. 그러나 세상이 잘 되어갈 수 없음을 알고는 집으로 돌아와 시와 글에 자기의 뜻을 맡겨 훌륭한 작품을 지어냈으며,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융희 483일 합병령을 군청에서 마을까지 반포하자 그날 밤에 아편을 마시고 다음 날 목숨이 끊어졌다. 유시4수를 남겼다.”

 

 

 

시대를 통찰했던 지식인

 

매천의 막역한 지기이고, 특출한 시인이자 문인이며 역사가였던 김택영은 매천의 본전에서 이렇게 썼다.

 

기개가 오올해 남에게 굽히려 하지 않았다. 교만하거나 자신이 귀하다고 여기는 무리를 보면 그 자리에서 면박했으니, 당시에 세도를 부리던 권력층들은 매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대하면 따뜻한 봄날처럼 화기롭게 담소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 가운데 멀리 귀양을 가거나 상을 당하는 경우에는 백리나 천리의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도보로 달려가 진심으로 위로하고 돌봐주며 조문했다. 평소에 글을 읽다가 충신이나 의사(義士)들이 곤경에 처해 액운과 싸우던 원통한 대목을 보면 그만 철철 눈물을 흘렸다.”

 

 

 

절명시 3

 

새나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오.

무궁화 우리나라 이미 망했구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 역사 회고하니

글이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윤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박석무 지음, 황헌만 사진, 조선의 의인들-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 한길사, 2010

 

박석무 : 1942년 전남 무안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하였다. 전남대 법대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오랫동안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생활하였다. 한중고문연구소장과 학술진흥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광주민주화운동 가담 등으로 인해 네 차례 투옥되기도 하였다. 논문으로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 다산학茶山學의 민중성 고찰, 다산학의 화이론華夷論 고찰, 다산학의 연원 및 시대적 배경 고찰, 고전 번역서로 다산산문선, 애절양哀絶陽, 다산시문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나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다산시정선(·), 역주 흠흠신서(1· 2· 3·원문), 다산문학선집, 다산논설선집, 저서로 다산기행,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우리 교육을 살리자,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등이 있다.

 

황헌만 : 황헌만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소년잡지 어깨동무소년중앙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현재 사진 작업실 ‘M2’를 운영하며, 사라져가는 우리 것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집으로 <장승> <초가> <조선땅 마을지킴이> <한국의 세시풍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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