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하나의 사건이다. 한 권의 책에 담긴 지은이, 만든이, 읽는이의 고뇌와 정성을 기억한다.
제목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동신인 ≪동신인의 민주화운동≫-동신의 12·12와 5·18
- [보도자료]
- 2024-10-01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동신인 ≪동신인의 민주화운동≫-동신의 12·12와 5·18
우리 동강학원은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 한국 민주주의의 요람이요, 성지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동신인들은 한 교문을 통해 입학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나는 이 교문을 「민주의 문」이라 칭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헌시
아! 빛고을 5월이여, 다시 살아 봄꽃처럼 흐르라!
지대위(동신고 11회 / 시인)
이제
우리는 지금 속에서의 ‘기쁨’을
여기 속에서의 ‘평화’를 보듬어 안고
‘너’와 ‘나’는 이렇듯 고운 사랑으로 만난다.
80년 5월, 피에 굶주린 무리들이 이 나라를 도륙하던 그날
압제와 폭력의 암울한 장벽을 향해
죽음으로 맞서
빛고을의 해방을 노래했던
그 수많았던 함성들
그리운 눈빛들, 가슴의 꽃들아.
그날.
그대의 가슴은 총칼에 뚫리고, 몽둥이에 갈가리 몸은 찢겨져 나갔지만
모두는 허기진 배를 주먹밥으로 채우고
도청 충장로 금남로 광주천을 따라
남녘의 모든 들판과 도시에서
해방의 노래, 힘찬 만세를 외쳤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던 그날의 빛나는 사랑들아!
푸른 빛 가득 넘치던 꽃다운 청춘, 아! 아름다움들아.
결코 멈출 수 없었던
그대들의 장엄했던, 소중한 용기를 기억한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함께한 영원한 자유 또한 기억한다.
참혹했던 핏빛 그날, 성난 파도가 되어버린 그대.
이젠 죽음의 잿빛을 헤치고 날아올라 불사조가 되었구나.
커다란 가슴이 되어 하늘이 되었구나.
두 발로 내달려 이 산하에 흐드러진 들꽃으로 피었구나.
넉넉한 역사가 되었구나.
역사는 시작과 끝이 없다.
끝없이 주고, 끝없이 되돌려 주는
생명의 자연처럼 역사엔 죽음이 없다.
오직 불멸의 역동하는 삶만이 있는 것처럼
되돌려 주고, 끝없이 이어받는 인연의 강물처럼
주고받음, 끝이 없는 연속성, 그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빛고을 새벽을 흔들어 깨웠던 힘찬 함성이여.
성난 파도의 그 눈빛이여.
오늘
우리 앞에 다시 서 있는 5월의 봄꽃 그대를 본다.
눈부신 하늘을 본다.
향기 가득한 그대 미소를 기억한다.
다시 흐르는 5월의 봄꽃 그대여.
불멸의 날개를 달고 끝없이 날아오르라!
다함없이 자유를 노래하라.
우뚝 선 무등산처럼 고요한 평화가 춤추게 하라!
∥발간사
동신인의 민주화운동』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학교의 역사이고 시대의 역사입니다
광주동신고등학교 총동창회 회장 조영종(동신고 14회)
『동신인의 민주화운동』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학교의 역사이고 시대의 역사입니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1년 6개월이 넘도록 자료를 모으고 원고를 작성하는 등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은 『총동창회 50년사』 편찬위원 신길웅, 홍기춘, 서호준 동문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새로이 편집진에 합류해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김대홍(동신고 8회), 김동민(동신고 9회), 경창수(동신고 12회) 동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특히 1980년 5월의 최후 항쟁지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경창수 동문의 노력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격려사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되어 자긍심으로 이어질 동신인들의 민주대장정 기록
5·18기념재단 이사장 원순석(동신고 2회)
1980년 5월이 광주의 ‘자랑스러운 역사’였다면 그 자랑스러운 역사에 우리 동신인들의 적지 않은 헌신이 배여 있음을 확인한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비켜설 수 없었던 5·18 진상규명과 이 나라의 민주화를 향한 ‘민주대장정’ 위에 선 동신인들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이 책에 이름을 올린 많은 동문들의 헌신은 세세년년 동신을 거쳐 가는 모든 후배들에게도 영광스러운 자긍심이 될 것이라 믿는다.
∥격려사
동신인의 자랑스러운 의(義) 정신, 미래의 희망으로 피어 오르기를…
전라남도교육감 김대중(동신고 9회)
80년 서울의 봄을 지나 5·18민주화운동, 87년 6월항쟁 등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이정표 곳곳에 동신인들의 발자취가 스며 있습니다. 군부독재에 맞선 이와 같은 동신인의 의로운 투쟁은 우리가 영원히 기려야 할 소중한 역사입니다. 한국 민주주의 대장정에 뿌려진 동신인의 ‘의(義)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자산이라 할 것입니다.
그 위대한 전통과 역사는 이제 동신인 모두의 자긍심이 되어 희망의 미래로 더 높이 도약해야 합니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생각만큼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는 숭고한 민주화운동 정신을 폄훼하고 역사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활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뿌리 뽑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후배들은 선배들이 쌓은 전통을 더 높이 세우고, 민주주의를 더욱 굳건하게 다지는 데 주어진 책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축사
동신 후배들에게 잊혀진 5·18이 아닌 살아있는 5·18로 계승 발전되길 기대합니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교장 한래진
이 책의 편찬은 동강학원의 교육지표인 애국인과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의 발간은 동신의 후배들에게 병장의 몸으로 12·12군사반란에 맞선 정선엽(7회) 동문의 의로움과 잊혀진 5·18이 아닌 살아있는 5·18로 그 정신을 이어받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스물여섯 분의 동신인의 정신을 계승하여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동신인들이 의향 광주, 예향 광주의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축사
동신고 재학생을 대표해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피 흘린 선배님들께 엎드려 절 올립니다
동신고 학생회장 이준우(동신고 3학년)
1979년 12월 13일 새벽, 병사로는 유일하게 반란군에게 대항하다 목숨을 잃은 정선엽 7회 선배님의 용기와 정의감은 호랑이를 닮았습니다. 5·18민주화운동 시기 피 흘린 동신고 상징인 호랑이를 닮았습니다. 고문받거나 감옥 가야만 하는 민주화운동을 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동신고 상징인 호랑이처럼 용감해야 합니다. 선배님들의 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받도록 눈 부릅뜨고 살겠습니다. 동신고 재학생을 대표해서 자유와 민주의 제단에 몸 바친 동신인들께 무릎 꿇고 절 올립니다.
∥추천 글
『동신인의 민주화운동』은 놀랍습니다
황광우(사단법인인문연구원동고송 상임이사)
『동신인의 민주화운동』은 놀랍습니다. 동신의 인연으로 이렇게 많은 분들의 삶을 다시, 새롭게 읽게 되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위대한 역사, 오월민중항쟁은 우리에게 저만치 떨어져 있습니다. 나의 고향에서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이지만, 무섭기만 하고, 무거운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동신인의 민주화운동』을 통해 다시 보는 오월민중항쟁은 가까운 이웃들의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학교는 친근한 추억의 공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친하게 지내던 강용주가 동신고였다니 동신고 출신 강용주의 이야기가 새롭게 들립니다. 정선엽 씨가 동신고 출신이었다니 <서울의 봄>을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고교생으로 참여한 경창수의 증언은 참으로 완벽한 오월의 증언이자, 그가 걸은 실천은 ‘오월 이후의 현대사’였습니다.
(…)
‘오월광주항쟁 이전’을 ‘Before May’라고 합시다. ‘Before May’를 대표하는 사건의 하나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지요. 윤강옥 선생은 ‘Before May’를 대표하는 광주의 청년이었습니다. 윤상원, 정상용, 이양현과 함께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구성한 분들입니다.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요양원에서 쓸쓸한 최후를 보냈다는군요.
‘오월광주항쟁 이후’를 ‘After May’라고 합시다. 1981년 5월 27일 서울대 도서관 5층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고 투신한 김태훈이 ‘After May’의 길을 걸은 분입니다. 이후 한국의 수만 명의 청년들이 ‘산 자여 따르라’는 오월 영령의 부름에 따랐습니다. 시위를 주도하고, 감옥에 가는 것은 자랑스런 청년의 훈장이었습니다. 감옥 문을 나서자마자 청년들은 공장으로 공장으로 달려갔습니다. 6월 대항쟁의 서막을 연 권인숙과 박종철이 ‘After May’의 대표적 청년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노동운동을 한 동신고, 동신여고 출신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노동운동을 이끈 탁월한 이론가였던 권우철은 동신고의 문을 출입한 청년이었습니다. 또 통일운동의 입문서를 집필한 이론가 이현영은 동신여고의 문을 출입한 청년이었습니다.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시기엔 본명도 모르고 출신학교도 모르면서 운동을 하였지요. 언젠가 두 분의 고향이 광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 분 모두 동신의 학교에서 공부를 한 학생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편찬사
그대들은 호랑이 터에서 자란 호랑이 중 호랑이입니다
신길웅(동신고 1회)
우리 모교 동신고는 1967년 개교하였습니다. 모교는 올해(2024년 3월 3일) 제58회 신입생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을 시작한 지 벌써 58년째 되었다는 뜻입니다.
50여 년 동안 동신의 교정을 떠난 동신인들은 나라 안과 밖에서, 사회 각 분야에서 나의 성장이 모교의 성장이 되도록 노력하였고, 나의 발전이 국가의 발전이 되도록 땀을 흘려 왔습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1972년) 이후부터 시작하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신인들의 민주화운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책 『동신인의 민주화운동』은 이 땅의 자유, 민주, 인권, 평등 등 누구나 사람답게 살고, 국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친 동신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역사적 건으로는 ‘12·12 군사반란(1979)’과 ‘5·18민주화운동(1980)’을 중심으로 피 흘린 27인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어느 누가 1979년 12월 13일 자정을 넘긴 시간에 몰려드는 반란군에 당당히 맞설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동문 정선엽(동신고 7회)은 반란군에 당당히 맞서다 죽음을 당했습니다. 어느 누가 1980년 5월 26일 밤, 탱크와 M16 소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공격을 알면서도 전남도청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내게는 그런 용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문 윤강옥(동신고 1회), 경창수(동신고11회 입학, 12회 졸업), 양승희(동신고 12회), 김경임(동신여고 10회)은 도청 안에서, 조재만(동신고 9회)・조대성 형제와 윤영철(동12회)은 도청 밖에서 최후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그리고 잡혀가 갖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의 위기가 찾아올 때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분연히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등 애국선열과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바친 민주열사 등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때문입니다.
『동신인의 민주화운동』에 실린 27인의 용기와 신념들은 어느 독립운동가, 민주열사 못지않습니다. 마땅히 추모하고 계승하고 확대되어야 할 이름이고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교는 풍수지리적으로 문천무만(文千武萬)의 호랑이 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개교 60년을 바라보는 길목에서 뒤돌아보니 더욱 호랑이가 가슴에 다가옵니다. 우리는 호랑이들입니다. 27인의 동문들은 호랑이 중에서도 호랑이다운 호랑이들입니다.
제1장
12·12와 정선엽
정선엽, 그의 정의감과 용기는 동신고 교정에서 키워졌다
정선엽은 1956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형과 함께 광주로 유학 와서 광주동신고등학교를 7회로 졸업했다. 동신고 재학 중에는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했다. 정선엽은 태권도 유단자였고 덩치도 좋았으며 의협심과 애국심이 남달랐다.
우리 중대장님 지시 없이는 절대 총을 줄 수 없다
당시 정선엽이 지키고 있던 벙커를 점령하기 위해 몰려든 공수부대원만 50명이었다. 순식간에 B2 벙커 출입구 외곽의 초소를 점령한 반란군은 벙커 점령을 위해 5~6명의 공수부대원을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보냈다. 정선엽은 총소리를 듣고 상황 파악을 위해 계단을 올라오다가 이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총을 내놓으라는 공수부대원의 요구에 정선엽은 “우리 중대장님의 지시 없이는 절대 총을 줄 수 없다”라고 외치며 끝까지 저항했다. 한동안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정선엽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쿠데타에 맞선 초병의 죽음
몸싸움을 하던 공수부대 박덕화 대위는 정선엽의 목에 권총을 쏘았다. 뒤이어 공수부대원이 정선엽을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정선엽은 그렇게 산화했다. 정선엽의 몸에는 목에서 머리로 관통한 1발, 가슴 부위에 3발의 총상이 남아 있었다. 정선엽은 옳은 일을 하고도 거대한 악에 죽임을 당했다.
모교 교정에서 열린 44년 만의 추모식-이제 시작이다
2023년 12월 12일, 모교 체육관에서 ‘의로운 동문 고 정선엽 동문(병장) 추모식’이 동신고 총동창회 주최로 열렸다. 정선엽이 떠난 지 44년 만이다. KBS, MBC, SBS 등 지상파 TV와 신문 등 수많은 언론 매체의 집중 취재가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2022년 3월부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신고 개교 이래 처음이라고 학교 관계자는 말했다. 2023년 12월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되어 관객 1,300만을 기록했다.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이고 정선엽 병장도 김오랑 소령도 나온다. 영화의 힘은 컸다. 국민들 가슴에 정선엽을 부활하게 만들었고, 동신고 동문들 가슴에 불을 댕겼다.
동신인들에게 숙제가 주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선엽의 불의에 맞서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 정신을 계승하고 확대하기 위한 2단계 기념사업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실천해야 한다.
제2장
5·18과 동신중학교
박인수로부터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제1보를 받았다
윤석루(동신중 4회, 당시 시민군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1956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대성초등학교에 다니다가 4학년 때 양동초등학교로 강제로 전학을 갔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1970년 동신중학교에 입학(4회)하였다가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중 2학년 때 자퇴했다. 광주공원 인근 월산동에서 당구도 치고 탁구도 치고 놀았다. 1980년 5월 27일에는 시민군 기동타격대장으로 최후까지 항쟁하다가 김종배와 함께 가장 마지막으로 도청에서 체포되었다.
시민군 기동타격대장 윤석루 씨는 회고한다.
나는 25일부터 이재호 씨와 기동타격대를 조직했다. 기동타격대라니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외곽 치안 책임대였다. 행정이 공백 상태였기 때문에 이 상태를 메꾸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급한 대로 포스터를 제작, 외곽지대를 돌며 붙이고 다녔다.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다음 번호로 전화하라’는 내용이었다. 25일이 월급날이었지만 돈을 뺏기 위한 강도를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26일부터 나는 군인들이 들어올 것에 대비, 타격대를 6개 조로 나누어 외곽지역을 순찰시켰다. 각 조마다 무전기 1대와 지프차를 배정했다. 새벽 1시 30분인지 2시인지 화정동을 지키고 있는 박인수로부터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제1보를 받았다. “군인의 전차를 발견하고 교전 중”이라는 보고와 함께 박인수가 다쳤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나는 바삐 대변인 윤상원 씨에게 알리고 수습대책위원회에도 알렸다. 나는 또 우리 조원들에게 비상을 걸어 도청 주변을 강화하였다. 대변인은 다시 목포 초급대학에 다니던 이경희 양을 시켜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는 차량 순회 방송에 나서도록 했다. 또 예비군을 동원, 총기를 배급하고 배치했다. 도망치면 더 큰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의당 잡힐 줄 알았지만, 우리 반은 아무도 도망갈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새벽 4시 반인가 군인들이 사전 경고 없이 총격을 가하고 화염방사기를 방사하며 뛰어 들어왔다. 나는 부지사실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제3장
5·18과 동신여자고등학교
민주화의 밥을 짓다
김경임(동신여고 10회)
식자재를 다듬고 밥을 짓고
시민군의 취사반 사람들은 언제나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집결하여 지시사항을 듣고 도청 밖으로 나가 가가호호 방문해 식자재를 구했다. 취사반 사람들은 도청에 모아진 식자재를 다듬고 밥을 짓고 식판을 날랐다.
“광주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밥을, 밥을 대접하는 일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그 일을 내가 하고 있잖아요. ‘내가 해야 하는 일’ 오로지 그 생각만 했던 것 같고,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단 한 번도 가족 생각은 안 났어요.”
다시 도청으로
25일부터 계엄군이 도청에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26일 저녁에 시민군들은 도청에서 학생들을 귀가시키려 했다.
“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다 나가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특히 여학생들은 다 나가라!’ 했어요. 우르르 나가면 눈에 띄니까 두세 명씩 조를 짜서 차례대로 나갔죠.”
그렇지만 김경임은 도청으로 다시 갔다. 풍향동에 있는 집에 거의 다 왔다가 도청으로 다시 갔다. 김경임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옳은 것 같았다.”
그리고 김경임은 엄중한 보초병을 뚫고서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박병규 열사(취사반장)를 만났는데 “죽으려고 다시 왔느냐?”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박 열사는 그녀를 도지사실에 숨겼다가 소나기 같은 총소리가 나자 다시 그녀를 데리고 도청 복도를 포복으로 기어갔다.
제4장
5·18과 동신고등학교
인생의 7할을 민주화에 바치다 _ 불꽃 윤강옥
윤강옥(동신고 1회, 5·18 당시 민주투쟁위원회 기획위원)
1980년 5월
1980년 5월 27일 새벽, 예상대로 전남도청에 대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죽음이 눈앞에서 오고 가는 절박한 시간에 윤강옥은 달랑 카빈총 한 자루 들고 도청을 지키고 있었다.
윤강옥은 전남 나주시 산포면이 탯자리다. 동신고 1회 2개 반, 107명 졸업생 중 1인이며, 전남대학교 사학과 1971학번이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하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80년 3월 복학해서 ‘전남대 복적학생협의회’ 총무로 5월을 맞는다.
1980년 5월 17일 밤 계엄사령부 전남분소는 윤강옥 체포에 나선다. 다행히 윤강옥은 몸을 피했다. 그러나 광주를 벗어나지 않고 18일부터 개인적으로 시위에 참여하다 22일부터 윤상원과 함께 도청을 오가며 활동했다.
‘민주투쟁위원회’ 기획위원 윤강옥
1980년 5월 25일 밤 10시 최후까지 싸우려는 항쟁지도부가 결성되었다. 투항파를 물러나게 한 것이다. 명칭도 ‘학생수습위원회’에서 ‘민주투쟁위원회’로 바꿨다. 12명의 지도부 중 윤강옥은 기획위원을 맡는다.새벽 4시 10분경 시작된 3공수여단 특공대의 도청 공격은 5시 15분까지 약 1시간이 걸렸다. 시민군은 도청 안에서만 16명이 사망했다. 중심적 역할을 한 윤상원 대변인도 총을 맞고 희생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신고 후배 양승희, 경창수(당시 동신고 3), 김경임(동신여고 2학년)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고 있었다. 윤강옥을 포함한 동신고 3인은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을 지켰다. 도청 밖에서는 윤영철(동신고 3), 조대성(동신고 3)과 조재만(동신고 9회) 형제도 27일 새벽을 지키다 끌려갔다온 사실이 밝혀졌다.
“오! 전남공화국 동지여, 환영합니다”라며 비아냥거렸다
도청이 계엄군에게 함락되면서 항쟁이 끝난 게 아니었다. 계엄군에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체포된 순간부터 참혹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윤강옥의 고통도 시작되었다. 윤강옥, 김종배, 박남선, 정상용, 윤석루, 정해직, 김준봉 등 ‘민주투쟁위원회’ 간부들이 보안대로 들어서자 덩치 큰 군인들이 맞이했다. “오! 전남공화국 동지여, 환영합니다.”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컴컴한 공간에 둥그렇게 서서 한 사람씩 뺨을 때리고 명치를 가격하여 고꾸라지면 일으켜 세워 때리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그렇게 4박 5일 정도 뭇매를 맞았다. 윤강옥도 그렇게 맞았다.
총알이 빗발치는 도청에서 살아남다
경창수(동신고 12회)
# 27일 전남도청 새벽 4시 30분.
건물 안쪽에서 우리를 향해 총탄이 날아왔다. 나는 “아군이다 쏘지 마라” 하면서 외쳐도 막무가내였다. 아마 미리 잠입하여 있던 특수부대원들이 총을 쏘아 대는 것으로 생각한다. 새벽 어둠 속이라 상황이 파악이 안 되었다. 총알이 오가는 횟수가 많아지고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 정문 쪽에 가서 상황을 알아보자고 하여 그쪽으로 따라갔다. 화단 경계석 아래로 포복해 정문 쪽으로 전진하여 갔다. 어디에서 그렇게 총알이 날아다니는지 귀가 멍했다.
정문에 가니 정문에 있던 경비가 “모든 외곽선이 무너지고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도청 정문 수위실 앞에서 갑자기 폭탄(스턴탄) 같은 게 도청 앞 분수대 쪽에서 날아와 터졌다. 장갑차가 있는 정문 쪽에서 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수위실 창구 밑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몇 초 지나 내가 살았나 죽었나 내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손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자식 죽을까 봐 못 가게 하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누가 지키겠습니까?
강용주(동신고 12회)
1. 옛날 생각
옛날 생각이 납니다. 80년 5월 26일 저녁이었지요. 항쟁 때라 다들 이른 저녁을 해 먹고, 해 진 거리로 나다니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이 차려주신 저녁을 먹으면서 어쩌면 이것이 당신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밥상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저녁밥을 한 그릇 다 비웠습니다. 부엌으로 가신 당신을 방으로 들어오시라 청했지요.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온대요. 도청 지키러 갈라요.”
“가지 마라, 거기가 어딘데 갈려고 그러냐.”
무릎 꿇고 심각한 얼굴로 결심을 말하는 저를 붙들고 당신은 만류하셨지요.
“어머니, 모두들 자기 자식 죽을까 봐 못 가게 한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누가 지키겠습니까? 오늘 밤만 이겨내면 미국이 우리를 도우러 온대요. 저라도 가서 도청을 지켜야 광주가 삽니다. 어머니, 갈랍니다.”
이미 교련복을 갈아입고서 도청으로 갈 준비를 다 해버린 자식을 앞에 두고 당신은 그저 내 손만 꼭 쥐며 놀라고 두려운 마음을 어쩔 줄 모르셨지요. 해가 저문 밤거리엔 가랑비가 내리고 그 빗속을 뚫고, 모두 모여서 도청을 지키자는 여자의 방송이 이미 패배와 좌절을 예고하듯 구슬프고 애절하게 들려왔습니다.
7. 어디서 핀들
제 지론은 ‘어디서 핀들 꽃이 아니랴!’입니다. 온실에서 자라난 장미도 꽃이라면 들판에서 피어난 민들레도 꽃입니다. 무릇 하나의 작은 생명 속에 온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데 어느 것인들 꽃이 아니겠어요. 바람에 실려 세상으로 흩날린 민들레 홀씨가 들판에서도, 창문 틈에서도, 높은 담 틈바구니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듯 저도 내 삶의 꽃을 피우려고 합니다. 어디서 핀들 꽃이 아니겠어요.
제4장
5·18 이후 민주ㆍ노동 운동에 참여한 동신인들
“인민노련에서 가장 탁월한 이론가”
권우철(동신고 9회)
1980년 5월 27일 광주는 진압되었지만, 붉고 푸른 5월 민주화운동은 87년 ‘민주화의 봄’을 거쳐 1990년대에 역사적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년 5월 ‘순교자들의 피를 두고 투쟁을 다짐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후 한국 현대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반민주 독재 세력에 대항하는 민주 시민 노동운동에 참여합니다. 노동운동은 민주화운동의 계승입니다. 혈연, 지연, 학벌을 떠나 많은 사람이 이 역사적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동신 동문 권우철 역시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몸을 던졌습니다.
∥편집 후기
동신인의 민주화운동 이 책은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피 흘린 동신인들의 정신을 기억하기 위해, 지켜내기 위해 편찬했습니다.
◎ 광주동신고등학교총동창회, 동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동신인의 민주화운동≫, 썬개발주식회사, 2024